골프장 최고경영자(CEO)는 사시사철 자연을 벗삼아 지내는 데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골프를 칠 수 있다. 실제로 전국 대부분 골프장에서 회원 대우를 받으며 각종 친목단체에서도 회원 영입 '1순위'에 오르곤 한다. 주위에서 "골프장 CEO 한번 해 보는 게 소원"이라는 소리도 종종 들린다.

홍인성 송추CC 사장(62)은 골프장업계의 '최장수 CEO'다. 그렇지만 홍 사장은 골프장 CEO에 대한 선입견을 가차 없이 깬다. 그는 한국골프장경영협회 이사직을 제외하고는 대외 활동을 일절 하지 않으며,인터넷 인물 검색에서도 좀처럼 그를 찾기 힘들다. 그는 골프장에 상주하지만 클럽하우스에서 300여명의 회원을 일일이 맞지는 않는다.

왜 그럴까. 골프장 CEO는 회원을 갑(甲)으로 모시는 을(乙)에 다름 아니라는 홍 사장의 철칙 때문이다. 사실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한다'는 국가정보원의 원훈이 어울릴 만한 곳이 골프장이다. 겨울철이면 북향인 송추CC에서 으레 재연되는 장면이 있다. "치워"라는 구령과 함께 새벽부터 시작되는 제설 작업이다. 구령은 홍 사장의 몫이다. 잔디를 보호하기 위해 눈을 치우는 일은 대부분 수작업에 의존한다. 10㎝ 이상 쌓인 눈을 며칠씩 치우다 보면 입술이 터지고 손에 물집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런 '음지의 노력'이 '잘해야 본전'인 골프장 업계에서 홍 사장은 송추CC를 흑자를 내는 몇 안 되는 골프장으로 만들었다. 영업과 명성,두 토끼를 잡았으니 그의 삶은 평범한 '파'인 듯하지만 그가 이룬 경영 실적은 화려한 '버디'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홍 사장은 육군 장교 출신으로 1974년 초 대한제당에 입사했다. 그곳에서 20년가량 근무한 뒤 1993년 계열사인 TS개발(송추CC의 법인명)로 자리를 옮겼다. 보수적인 조직에서 기본과 원칙을 중시하는 생활을 체득한 게 '프로 골퍼 입문기'라면 15년 이상 CEO를 맡고 있는 것은 메이저 대회를 섭렵한 '그랜드 슬램'에 비견된다.

골프만큼 에티켓을 중시하는 운동도 많지 않다. 규칙과 매너를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 골프의 기본이다. 그래서인지 골프장 CEO인 그에게 기본 준수는 생활 그 자체다. 올해 경영 모토도 '기본에 충실하자'로 정했을 정도다. 그가 강조하는 기본은 시간과 약속을 엄수하고,맡은 일을 끝까지 책임지며,고객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들이지만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지름길을 찾고 조금이라도 편해지려는 게 인간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기본에서 일탈하는 직원에겐 불호령이 떨어진다. 직원들에겐 '호랑이'보다 무서운 사장이다. 그런 그의 외모에 큰 변화가 생겼다. 올초 환갑이 넘은 나이에 머리를 검게 염색한 것.회원과 고객을 편안하게 맞이해야 하는 서비스업 종사자로서 용모를 단정하게 보이기 위해서란다.

골프장 업무의 '핸디캡 넘버 1'은 부킹(예약) 청탁이다. 몇 년 전 관할 지방자치단체인 양주 시장이 부킹을 부탁한 적이 있다. 홍 사장 답변이 걸작이다. "골프장 회원권을 사세요. " 송추CC에는 '끼워 넣기'(예약 없이 중간에 팀을 끼워 넣는 일)가 없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일화다. 그 덕분에 라운드 시간은 4시간20분을 넘지 않는다. 회원제 골프장에서 모든 업무와 서비스는 회원의 편의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의 경영 스타일을 여자 프로 골퍼에 비유하면 미셸 위보다는 신지애에 더 가깝다. 장타를 쳐서 일거에 만회하기보다는 18홀 내내 기복 없는 플레이를 펼치는 타입이다.

송추CC는 '명문 골프장 도약' '10대 골프장 마스터플랜' 같은 거창한 구호를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회원들을 위한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개장 때부터 악천후로 아침 라운드를 못하는 고객에게는 돈을 받지 않고 식사를 제공한다. '역시 송추CC야!'라는 평가를 받는 대목이다.

바람이 세차고 추운 겨울에는 청주를 안주(순두부)와 함께 무료 서비스한다. 가을엔 회원을 위한 클럽하우스 클래식 콘서트를 열고,원만한 경기 진행을 위해 코스 내 GPS(위성항법 시스템)를 도입한 것도 그의 아이디어다.

송추CC 하면 떠오르는 것이 '유리알 그린'이다. '한국의 오거스타'라는 명성은 수년간 흘린 땀방울의 결과다. "그린과 잔디도 사람과 똑같애.건강해야 제 기능을 발휘하는 거야." 그는 잔디가 머리를 내미는 이맘때면 매일 기도하는 심정이란다. 한 해 '장사'가 바로 잔디 상태에서 판가름 나기 때문이다.

그가 평일 이틀에 걸쳐 9홀씩 코스를 도는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다. 회원들이 다 치고 난 늦은 오후 시간대에 카트를 직접 몰면서 그린과 페어웨이를 점검하고 수리하는 것.골프 실력은 핸디캡 10 정도다.

그는 아침 9시 이전에 출근하고 오후 7시,여름 시즌에는 오후 9시께 골프장을 나선다. 주말 근무는 일상화된 지 오래다. 그 때문에 모임에 'OB'를 내지 않기 위해 가급적이면 식사 약속을 잡지 않는다. 그의 가족은 30여년간 그를 내조한 아내와 장성한 아들 둘로 단출하다. 그렇지만 그 흔한 해외 여행 한번 가 본 적이 없다.

은퇴 후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게 그가 바라는 '인생 홀인원'인 셈이다. 아침마다 해외 관광지를 소개하는 방송 프로그램을 즐겨 보는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인지 모른다.

김진수 기자 tru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