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대한민국 야구를 세계 2위로 이끈 김인식(62) 감독.

2006년 1회 대회에서는 변방에 머물던 한국 야구를 세계 4강에 올려놓았고 이번에도 '국민감독'의 리더십을 발휘해 한 단계 진일보한 성적을 내고 금의환향했다.

역경을 헤치고 한국 야구의 위상을 높인 김 감독의 지도력은 다시 여러 사람의 입에 떠올랐고 김 감독은 밀려드는 인터뷰 요청에 3년 전 이상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어려운 경제 여건에 시름을 앓던 국민은 야구대표팀이 WBC에서 쓴 드라마를 보고 모처럼 웃음을 찾았다.

취재 현장에서 본 'WBC 드라마'의 원작자이자 연출자인 김인식 감독의 한마디, 한마디에도 재미와 감동이 넘쳤다.

때로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복선도 감춘듯했다.

◇넌 수석코치라는 애가 달랑 악수만 하고 마냐?(9일 WBC 1라운드에서 일본을 1-0으로 꺾은 뒤)
김인식 감독이 동국대 시절 제자인 김성한 수석코치에게 한 말이다.

김 코치는 일본에 2-14로 참패했다가 마운드의 강력한 힘을 앞세워 1-0으로 설욕에 성공한 날, 김 감독이 울었다고 귀띔했다.

승리에 기뻐서 눈물짓던 김 감독은 무심하게 '고생하셨다'면서 손만 내밀던 김 코치에게 핀잔을 줬다.

쑥스러웠던지 김 코치는 냉큼 김 감독을 와락 껴안았고 이후 더그아웃에서는 승리했을 때 '포옹 세리머니'가 이어졌다.

18일 일본을 꺾고 준결승 진출을 확정했을 때도 김 감독은 눈물을 훔쳤고 또 포옹을 했다.

김성한 수석 코치는 '포옹'을 이렇게 해석했다.

"오라는 코치들(현역 감독들)은 안 오다 보니 결국 나나 이순철 타격 코치 등 '재야에 있는' 사람들이 대표팀에 오게 됐고 갖가지 사정으로 팀을 꾸리기도 힘들지 않았나.

대회를 준비하면서 서로에게 애틋한 감정이 생겨 자연스럽게 껴안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여기는 웬만해선 주사를 안 놔줘(10일밤 취재진과 저녁 식사자리에서)
김 감독은 9일 밤 전세기편으로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로 이동하면서 지독한 감기에 걸렸다.

현지 병원을 찾았지만 주사는 커녕 약만 받았고 약효는 금방 나타나지 않았다.

김 감독은 콧물이 줄줄 흘러 화장지를 끼고 살았다.

장수가 위태롭자 병졸들도 시차 적응과 감기 몸살 증세로 집단 피로를 호소하기 시작했다.

A조 1위로 1라운드를 통과했다는 자신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2라운드가 시작되는 16일 전까지 빨리 컨디션을 추스르는 게 과제로 다가왔다.

김 감독은 15일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펫코파크에서 2라운드 대비 훈련을 하면서 "야구장에 들어오면서 안 추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여긴 밤에 무지 춥걸랑"이라고 염려했다.

3년 전 대표팀은 이곳에서 결승행 티켓을 내줬다.

'악몽'과 '추위'로 김 감독의 머릿속이 가장 복잡했던 때다.

◇이용규는 원래 상대 투수를 잘 괴롭히는 타자다(16일 멕시코전 승리 후)
막강한 타선을 앞세운 멕시코를 8-2로 꺾고 김 감독이 이용규(KIA)를 톱타자로 기용한 배경을 설명한 말이다.

김 감독은 1라운드에서 이종욱(두산)을 첨병으로 중용했다.

이종욱은 하와이주 호놀룰루에서 전훈을 시작했을 때 이미 주전 중견수 겸 1번 타자를 낙점받은 선수였다.

그러나 이종욱의 타격 컨디션은 썩 좋지 않았고 출루율도 급감했다.

코치들은 피닉스 전훈부터 작년 베이징올림픽에서 펄펄 난 이용규로 바꿔야 한다고 진언했다.

"이종욱이? 뭐?. 내가 보기엔 괜찮더구먼"이라던 김 감독의 생각은 샌디에이고로 이동한 뒤 바뀌었다.

멕시코전부터 톱타자로 출격한 이용규는 1-2로 뒤진 2회 좌전안타로 출루한 뒤 2루를 훔쳤고 박기혁의 내야땅볼을 멕시코 2루수 에드가 곤살레스가 1루에 악송구하는 사이 재빨리 홈을 밟아 2-2 동점을 만들고 흐름을 뒤집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용규는 18일 일본전에서도 1회 안타 후 2루를 훔쳐 일본 선발 다르빗슈 유(니혼햄)를 흔들었고 1회에만 대거 3점을 뽑아 4-1로 이기는 데 수훈갑으로 활약했다.

◇처음에는 막연했고 지금은 흥분된다.

위대한 도전을 해보겠다(20일 베네수엘라와 준결승을 앞두고 공식인터뷰에서)
3년 전 초대 WBC 때는 야구인으로서 이런 대회가 생긴다는 게 막연히 기쁘고 좋았지만 이번에는 경기를 할수록 어렵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하지만 세계적인 선수들과 만난다는 기쁨에 '흥분'은 감출 수 없었고 덧붙였다.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는 아니나 평소 메이저리그를 자주 시청하는 김 감독은 슈퍼스타와 게임한다는 자체에 선수 못지않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면서 "한국과 베네수엘라, 서로서로 잘 모른다.

야구는 실력 있는 쪽이 꼭 훌륭한 결과를 얻는다.

'위대한 도전'을 해보겠다"고 출사표를 던졌다.

평범한 소감 대신 김 감독이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채 '위대한 도전'이라는 멋진 말로 포부를 밝히자 현장에 있던 한국 취재진은 누구랄 것 없이 환호했다.

◇까르르 까르르(20일 다저스타디움에서 연습 때 베네수엘라 TV 취재진이 카메라를 들이대자)
김 감독이 그렇게 웃었다는 게 아니다.

정확하게 '까르르 까르르'라고 발음하자 취재진도 덩달아 웃었다.

김 감독은 카메라를 보고 마치 스페인어를 하는 것처럼 능청스럽게 '까르르 까르르'를 되뇌었다.

이어 "내가 베네수엘라에 대해 조금 알지. 케세레스 있잖아"그러면서 설명을 붙였다.

케세레스는 김 감독이 두산 지휘봉을 잡았던 1998년 데리고 있던 베네수엘라 출신 외국인 선수다.

김 감독은 "베네수엘라에는 메이저리그 각 팀에서 중요한 노릇을 하는 강타자가 포진했다"면서도 워낙 적극적으로 볼을 휘두르는 상대 타선에 자신감이 있었는지 평소와 다른 여유를 보였다.

김 감독은 "죽기 전에 한번 서보는구나"라며 로스앤젤레스 다저스타디움 전광판을 배경으로 코치진, 기자들과 사진도 찍었다.

대표팀은 베네수엘라를 10-2로 대파하고 결승에 올랐다.

◇이치로를 혼내주고 싶었다.

(26일 MBC TV와 인터뷰에서)
김인식 감독이 왜 그렇게 일본과 결승전 연장 10회에 아쉬움을 두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3년 전에도 막말을 해 한국 야구인들의 공분을 일으킨 일본 공격의 첨병 스즈키 이치로(시애틀)를 침묵하게 민들고 싶었다.

그러나 마운드에 있던 임창용(야쿠르트)과 사인이 맞지 않아 통한의 2타점 결승타를 맞고 패하자 "이치로가 천장에 왔다갔다 해 잠도 자지 못했다"며 분함을 이기지 못했다.

여기서 양상문 투수코치의 한 마디. 김 감독은 당시 3-3이던 연장 10회 2사 2,3루 이치로 타석 때 임창용 대신 김광현(SK)을 염두에 뒀다.

그러나 투수들의 컨디션을 가장 잘 아는 양 코치가 "창용이의 페이스가 가장 좋으니 계속 두자"고 했고 최악에는 "거르자"고 뜻을 모았으나 중간에 일이 터지고 말았다.

양 코치는 "창용이가 안타를 맞은 공은 싱커였다.

창용이가 그전에 싱커를 효과적으로 던졌으나 주자가 2,3루에 있다 보니 힘있게 뿌리지 못해 어정쩡하게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간 것 같다"고 설명했다.

지나간 얘기이나 결단은 감독의 몫이다.

'김광현이었다면', '임창용이 고의4구로 이치로를 걸렀다면' 등 '만약'이라는 가정에 대한 안타까움은 몇 곱절 클 수밖에 없다.

그보다도 김 감독은 2004년 말 뇌경색으로 쓰러져 몸은 불편하나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승부수로 결승까지 올라왔고 정상 문턱에서 꿈이 좌절된 터라 아쉬움이 더 컸던 모양이다.

(서울연합뉴스) 장현구 기자 cany9900@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