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로 국내 경제가 신음하던 1998년.

'쿠쿠(CUCKOO)'라는 브랜드를 내건, 당시로는 생소한 전기밥솥이 하나 등장했다.

극심한 경기 불황기에 성광전자라는 무명의 중소기업이 일반 소매 가전시장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그로부터 불과 1년 뒤, 쿠쿠는 국내 밥솥시장 점유율 1위로 올라서는 이변을 일으켰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시장 점유율 70%를 차지, 부동의 정상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국인의 밥맛을 사로잡은 쿠쿠는 코끼리밥솥으로 유명한 밥솥 종주국 일본을 비롯한 30여개국에 수출되고 있을 정도로 국제적인 '밥맛'을 인정받고 있다.

최근에는 2세 경영에도 안착, 기술개발과 해외 시장 개척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른바 '쿠쿠 신화'를 창조한 성광전자는 1978년에 설립됐다. 창업주는 구자신 회장(67). 구 회장은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과는 10촌 사이다.

경남 진주시 지수면이 고향인 구 회장은 어린시절 구자경 명예회장 집과 담 하나를 두고 살았다.

그는 원래 정치 지망생이었다. 1964년 고려대 총학생회장 시절 한.일 국교 정상화 반대를 이끌었던 핵심 멤버이기도 하다. 그와 함께 투쟁했던 고려대 상대 학생회장이 바로 이명박 대통령이다. 구 회장은 대학 졸업 이후 훗날 쌍용그룹의 모체가 된 금성방직에 취직한다. 금성방직은 당시 거물급 정치인이던 성곡(省谷) 김성곤 국회의원의 회사였다. 총학생회장 출신의 이력을 눈여겨본 김성곤 의원은 또 다른 계열사인 동양통신(연합통신의 전신) 사장의 비서이자 국회의원 비서관으로 구 회장을 발탁했다. 하지만 김 의원이 1969년 오치성 내무부 장관 해임안 가결에 일조한 '항명사건'의 핵심 인물로 지목받으면서 공화당을 탈당,정계를 떠나게 되자 이를 계기로 구 회장도 정치에서 손을 뗐다.





㈜쌍용으로 복귀한 구 회장은 무역 업무를 익힌 뒤 1976년 오퍼상 및 전기부품 소재 사업에 뛰어들었다. 금성사(LG전자의 전신)가 소형 가전제품 생산을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전환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구 회장은 집요하게 타진한 끝에 1978년 전기보온밥솥 사업권을 따냈다.

"금성사 오너 일가와 친척이라서 협력업체에 선정됐다는 오해를 종종 받습니다. 하지만 더 가까운 인척들도 그때 사업 의사를 밝혔지만 탈락했어요. 실제 1990년대 초반에 우리가 독자 브랜드로 소매시장에 진출하려 했을 때에는 막상 LG전자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지요. "(구 회장)

1997년 말 외환위기 여파로 소매 가전시장이 직격탄을 맞았다. 성광전자도 재고가 쌓여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해결책을 요구하는 구 회장에게 LG전자 측은 독자 브랜드로 위기상황을 돌파해 보라는 뜻을 내비쳤다. 회사 생존을 위해 전 직원의 임금을 삭감하는 고통분담이 시작됐다. 구조조정을 하지 않자 직원들도 똘똘 뭉쳤다.

구 회장은 소매시장 진출을 위해 마케팅 부문을 신설했다. 장남인 구본학 대표(39)에게 부문장 자리를 맡겼다. 브랜드는 쿠쿠(CUCKOO)로 정했다. 쿠쿠는 뻐꾸기란 뜻의 보통명사.시간을 정확하게 지키는 습성이 있는 뻐꾸기처럼 신용도를 강조하고 발음상 요리(COOK)라는 단어와 구(KOO)씨라는 의미가 결합된 브랜드다. 사명도 2002년 11월에 쿠쿠전자로 바꿨다.

이때부터 구 대표는 제품 기획에서부터 판촉,홍보,국내.해외 영업을 진두지휘하는 등 2세 경영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구 회장이 처음 시도한 유통 시스템 개혁을 마무리지은 것도 구 대표가 거둔 성과다. 일선 대리점에 먼저 물건을 넘기고 수금하던 관행을 바꿔 선금을 받고 제품을 내주는 방식을 도입한 것.일선 대리점과 영업부서의 반발이 컸지만 밀어붙였다.

4~5개월이 넘도록 쿠쿠 측이 고집을 꺾지 않자 대리점들도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때마침 대기업 가전사들이 밥솥시장에서 완전 철수하면서 쿠쿠는 무주공산의 호기를 맞아 큰 폭의 매출 신장을 거두었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2006년 대표이사로 취임한 구 대표는 그해 수출 1000만달러를 달성했다. 외환위기 직전 연매출 300억원이 채 되지 않았던 쿠쿠는 지금 3000억원 이상을 올리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한 해 밥솥 판매량만 210만대가 넘을 정도다.

구 대표는 "쿠쿠의 성공비결은 꾸준한 기술개발의 결과"라고 강조한다. 특히 쿠쿠는 일본과 달리 압력밥솥 개발에 주력했다. 뚜껑에 무거운 돌을 올려 놓고 밥을 짓는 '가마솥 밥맛'을 재현하려는 시도였다. 천연곱돌로 만든 전기압력밥솥을 비롯해 밥솥 안쪽 뚜껑이 분리되는 '분리형 커버',뚜껑에 위치한 조작부 등은 쿠쿠만이 보유한 독보적 기술들이다. 특히 중국에서는 예전 국내에서 유행했던 일제 코끼리밥솥에 버금가는 열풍이 불고 있다.

또 다른 비결이 있다면 직원들과의 소통을 중시하는 경영철학.창업주 구 회장의 경남 양산 본사 집무실은 겨울에도 근무시간에는 문을 닫지 않고 열려 있다. 직원들을 격의 없이 대하기 위해 비서도 따로 두지 않는다. 구 대표도 이 같은 전통을 이어 서울 논현동 지사의 집무실을 아예 유리벽으로 꾸몄다. 이런 사풍 탓인지 아직까지 노조가 없을 정도다. 구 대표는 "직원들과 항상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다 보면 절로 화합이 된다"고 말했다.

경남 양산=이정선 기자 sun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