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지야와 러시아 간 전쟁이 3일째로 접어들고 있는 가운데 영토 회복을 공언하며 큰 소리쳤던 미하일 사카슈빌리 그루지야 대통령이 서서히 꼬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사카슈빌리 대통령이 러시아에 휴전과 협상 시작을 제안했다고 이타르 타스 통신이 9일 보도했다.

그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에게 러시아가 공격을 중단하면 언제든지 협상에 응할 준비가 돼 있는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오전(현지 시간)까지만 해도 의회에 계엄령 승인을 요청할 것이고 전쟁을 선언하는 문서에 서명했다면서 전쟁을 계속할 태세이던 그가 불과 몇 시간 만에 `휴전'이란 카드를 꺼내 들고 나온 것이다.

또 전날 힘겹게 손에 넣었던 남오세티야 수도 츠힌발리에서 자국 군대의 철수도 명령했다.

물론 러시아군의 무력 사용 중단을 전제로 하긴 했지만 사실상 패배를 인정할 테니 전쟁을 그만하자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처럼 사카슈빌리의 기(氣)가 꺾인 것인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전날 츠힌발리를 그루지야가 장악했지만 러시아의 반격은 신속했고 냉혹했다.

전투기와 박격포에 이은 공수부대의 공격을 막아내며 츠힌발리를 지켜내기는 역부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남오세티야에서 그루지야군이 수세에 몰린 틈을 타 또 다른 친러 성향의 자치공화국 압하지야가 자국 영내에 주둔하고 있는 그루지야군을 공격한 것은 그에겐 큰 부담이 된 것으로 풀이된다.

이라크에 파병됐던 2천명의 군인들을 불러들이기는 했지만 사단 규모인 3만 9천명의 전 병력으로 두 곳에서 동시에 세계 최강 러시아를 대적하기에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틀간 그루지야군과 러시아군의 교전으로 남아오세티야 주민 2천여 명이 숨졌으며 그루지야도 자국 군인과 민간인 128명이 숨지고, 748명이 부상하는 등 전쟁 초반 희생자가 너무 많이 나온 것도 그가 서둘러 휴전을 제안한 이유로 보인다.

특히 베이징(北京) 올림픽 개막식 당일 남오세티야를 침범한 것은 치명적 실수라는 지적이다.

평화를 바라는 전 세계인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면서 국제사회의 강한 비난을 샀고 결국 영토 회복이라는 대의명분도 크게 훼손됐다.

중국 군사전문 사이트인 딩성(鼎盛)군사는 9일 '그루지야가 올림픽 개막일에 전쟁을 일으켜 중국의 체면을 깎아내렸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개막식 당일에 전쟁을 일으킨 것은 중국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비판했다.

이와 함께 믿고 있던 미국의 반응이 신통치 않은 것도 사카슈빌리의 자신감을 잃게 한 동기가 됐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미국에서 나온 것이라곤 여느 서방국가와 마찬가지로 폭력 중단 촉구였다.

아무리 조지 부시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 중이라고는 하지만 지금까지 미국의 충견(忠犬) 노릇을 해온 자신에게 `큰 힘'을 실어주리라는 희망은 그야말로 기대에 불과했다.

부시 대통령은 이날 성명에서 러시아와 그루지야 양측에 폭력사태가 발생하기 이전인 8월6일로 돌아갈 것을 촉구했다.

무엇보다 사카슈빌리가 휴전을 서두르는 데는 그루지야 국민들에게 이번 전쟁을 통해 국가 지도자로서 영토 회복 의지를 확실히 보여줬다는 점이다.

사회개혁 실패로 국민들로부터 큰 지지를 받지 못했던 그에게는 영토 통합은 국면 전환용이었고 비록 무력이라는 최악의 수단을 사용하기 했지만 국민들의 단합을 꾀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또 일부 희생이 있었지만 러시아의 개입으로 실패했다는 변명거리도 확보한 셈이다.

(모스크바연합뉴스) 남현호 특파원 hyunh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