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장비를 생산해 해외에 수출하고 있는 중견기업 사장 C씨는 "대기업의 존재를 재발견하고 있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주물을 생산해 대기업에 납품하는 중소기업을 경영했던 그가 지금의 사업으로 업종을 바꾼 건 3년여 전.대기업 하청업체로 남는 한 '을'의 신세를 벗어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글로벌 무대에서 당당하게 사업을 키우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변변한 실적 하나 없이 팸플릿만 들고 외국 기업을 찾아다니려니 막막할 뿐이었다.

그런데 웬일인가.

그의 명함을 받아든 몇몇 외국 기업인들로부터 의외의 반응을 들었다.

"아,한국 기업이군요.

삼성,현대,LG가 한국 회사 아닙니까.

한번 샘플을 보내보시죠."

대기업을 '갑'으로 모시는 하청업체 신세가 싫어서 해외로 눈을 돌린 그에게,지긋지긋했던 그 대기업들이 '수호 천사'가 돼 자신의 새로운 사업을 도와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게 그의 고백이다.

지난 4일자 한국경제신문에 소개된 조선 기자재 전문업체 STI의 김대규 사장도 비슷한 경험을 들려준다.

선박 건조경험이 전혀 없는 그가 쿠웨이트 정부로부터 1500만달러짜리 특수소방선 건조 프로젝트를 따내 업계를 놀라게 했다.

어떻게? 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 등 대기업들의 조선 기술과 품질관리 기법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가 결정적인 '지원군' 노릇을 했다는 설명이다.

글로벌 강자로 떠오른 몇몇 대기업들의 존재는 이처럼 예상하지 않았던 부수 효과를 곳곳에서 내고 있다.

지난달 미국 자동차회사 GM이 한국 자동차부품회사 39곳만을 디트로이트로 불러 구매전시회를 갖고,차세대 전기자동차 부품 개발사업에 참여시키겠다고 밝힌 것도 따지고 보면 '대기업 효과'다.

현대ㆍ기아자동차 등 대기업들에 부품을 납품하면서 경쟁력을 키운 것이 해외로까지 판로를 넓히게 만든 원동력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천지불인(天地不仁)이란 말이 있듯이,대기업들이 특별히 중소기업들을 염두에 두고 '착한 일'을 한 결과는 물론 아니다.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경쟁력을 키워나간 결과가 미지의 후발 중소기업들에까지 후광(後光)을 비춰줬을 뿐이다.

에둘러서 기업의 사회공헌이나 대-중소기업 상생(相生)을 강조하지 않더라도,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곳곳에서 기업들은 사회공헌과 상생을 실현해가고 있다.

묵묵히 자기 갈 길을 헤쳐 나가고 있는 기업들에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강조한 정부가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말뿐이다.

이명박 정부는 지난달 '기업 환경 개선대책'이란 걸 내놨지만,수도권 규제완화 등 논란에 대한 정면 돌파를 수반해야 하는 알맹이 조치들은 고스란히 빼놨다.

금산분리 완화와 고용관련법 개정 등 핵심 개혁 조치들도 '쇠고기 수렁'에 빠진 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는 도리어 유동성 관리를 위해 기업들의 M&A(합병ㆍ인수)용 은행 차입을 규제하겠다는 등 시장 개입의 칼춤까지 예고하고 있다.

정부와 기업은 제각기 지켜야 할 자리가 따로 있다.

정부는 두 달째 실종돼버린 '법과 원칙'을 제대로 복원시키는 것으로 '비즈니스 프렌들리'의 첫걸음을 삼아야 한다.

설익은 수사(修辭)로 기업을 들었다 놨다 하는 일도 삼가기 바란다.

시장을 모르면서 감놔라 대추놔라 하지 말고,차라리 그냥 놔두는 쪽이 비즈니스 프렌들리의 차선책은 될 수 있다.

이학영 산업부장ㆍ부국장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