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말 좀 참아주세요."

25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이 20원 넘게 폭락하자 한 외환딜러가 탄식처럼 내뱉은 말이다.

이 딜러는 "오늘 환율이 급락한 데는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의 '환율 천장' 발언이 큰 영향을 미쳤다"며 "가뜩이나 변동성이 심한 시장에서 정책당국자들의 발언이 변동성을 더 키우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최근의 원.달러 환율 하락이 정부당국자들 때문만이라고 볼 수는 없다.

미국 금융시장 불안이 어느 정도 수그러들면서 외국인이 국내에서 주식 순매수에 나서고 있고,이에 따라 국내 외환시장에서 원화를 사들이는 수요가 늘어 환율이 떨어지는 측면이 있다.



문제는 이 같은 상황에서 환율의 방향성을 가속시키는 말들이 쏟아져 "불에 기름을 퍼부은 꼴"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국 '입'에 따라 환율 널뛰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정부당국자들의 '입'이 외환시장의 주요 변수로 떠올랐다.

시장 참여자들은 "정부가 오늘은 무슨 말을 할지 쳐다보는 일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이 총재뿐만이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과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최중경 기획재정부 1차관도 이미 환율 관련 발언으로 외환시장에 적지 않은 충격을 미쳤다.

강 장관은 지난 4일 취임 직후 "중앙은행 입장에선 원화 강세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정부의 환율 정책과 상치되는 측면이 있다"고 밝혔다.

시장에서는 이를 정부가 원화 약세(환율 상승)를 원한다는 신호로 해석했다.

이후 원.달러 환율은 불과 2주 만에 947원대에서 1032원까지 치솟았다.

최 차관은 19일 "원화는 최근 수년간 고평가됐기 때문에 최근 원.달러 환율 상승은 (과거 고평가됐던 부분이) 일부 정상화되는 과정"이라고 밝혀 '급등세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상승세는 용인한다'는 시그널을 시장에 줬다.

이 같은 환율 급등은 정부와 한은의 시장 개입으로 겨우 진정됐다.

정부와 한은은 18일 "환율 상승 속도가 우려스럽다"며 구두 개입에 나선 데 이어 10억달러 상당의 달러 매도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급등하던 환율이 갑작스럽게 꺾인 데는 대통령의 발언도 영향을 줬다.

이 대통령은 20일 청와대회의에서 "(전 세계적으로) 달러 가격이 하락하는데 우리는 달러 가치가 상승하는 역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며 "이는 기업경영에 위협을 주는 요소이고 특히 물가가 대폭 상승하는 요인"이라고 말했다.

시장에선 이를 '환율 상승 제어'를 시사하는 발언으로 해석했다.

당시 원.달러 환율은 장 초반 9원가량오르기도 했지만 이 대통령의 환율 상승에 대한 우려로 외환당국의 개입에 대한 경계감이 형성되며 상승폭이 90전으로 제한됐다.


◆자칫하면 '환율조작국'

최고 정책당국자들이 환율에 대해 직접 언급하는 것은 외국에선 보기 힘든 이례적인 일이다.

외환시장 관계자는 "선진국 대통령이나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일본은행 총재 등이 환율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굳이 얘기할 때는 "급등락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원론적 수준의 멘트가 대부분이다. 환율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외환시장에 큰 충격을 줄 수 있는 데다 자칫하면 노골적인 시장개입으로 비쳐져 '환율조작국'으로 지정될 수 있다는 점에서다.

미국 재무부는 6개월에 한 번씩 환율보고서를 작성해 의회에 제출하는데 여기서 환율조작국으로 분류되면 무역보복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정부 관계자들조차 "어느 나라나 환율에 대해서는 재무부 장관이나 정책 당국자에게 물어봐서는 안 된다"고 할 정도다.

시장이 방향을 예측하고 베팅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또 다른 외환딜러는 "우리나라는 높은 '양반'들이 말이 너무 많다"며 "환율은 기본적으로 시장 움직임에 맡기고 정책 당국자들은 보다 신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용석 기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