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회는 생각도 못해요.

은행원에게 연말은 한 해 중 가장 바쁜 때거든요."

새해를 나흘 앞둔 서울 청계천 거리.날이 어스름해지자 장식용 조명이 화려하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앤드루 하트레즈 차장(28)은 종각 건너편에 위치한 SC제일은행 본점 8층 사무실에서 송년 분위기로 들떠 보이는 퇴근 인파를 바라보면서 일에 파묻혀 있었다.

상품개발부에서 각종 예금 상품을 만들고 있는 하트레즈씨는 사내에서 '아이디어 맨'으로 통한다.

그는 자신이 직접 기획한 금융상품들의 성과를 점검하고 내년 사업 방향을 내놓느라 좋아하는 술도 잠시 끊었다고 했다.

하트레즈씨가 미국을 떠나 한국에 온 지는 만 5년이 넘었다.

그는 하버드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한국에 취직해 자리를 잡았다.

어머니가 한국인인 그에게 한국은 또 다른 고향이다.

"어머니의 나라를 꼭 경험하고 싶었습니다.

역시 피는 못 속이는지 처음 서울에 왔을 때도 그렇게 낯설지 않더군요."

유창한 한국말은 이미 서울 토박이와 다를 바 없었다.

기사가 나가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젊은이가 차장'이라는 '악플'이 달릴까봐 걱정이라며 싱긋 웃었다.

24시간 고객의 반응에 귀를 열어야 하는 곳이 상품개발 부서다.

누구보다 한국인과 한국문화를 깊이 이해해야 하는 만큼 한국어도 죽기살기로 배웠다고 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곧잘 "왜 선진국을 떠나 한국에 사느냐"고 묻는다.

그때마다 그는 "한국이 바로 선진국"이라고 대답한다.

미국 사람도 똑같이 현대차 타고 삼성이나 LG 휴대폰을 쓴다고 덧붙인다.

오히려 은행의 소비자 서비스는 한국이 훨씬 앞서 간다고 강조했다.

"미국에서는 현금카드 만들 때 일주일씩 걸리고 통장 정리는 손으로 일일이 써가며 합니다.

한국에서 그렇게 하면 고객들이 당장 회사에 쳐들어올 것입니다.

현금카드도 바로바로 만들어주고 통장정리는 자동화기기로 몇 초 만에 끝내죠.한국식 '빨리빨리 문화'가 금융 서비스 시장의 경쟁력을 최고 수준으로 높여 놓은 셈입니다.

미국에 오히려 수출해야 할 아이템이 아닐까요."

요즘 하트레즈씨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은행권 예금이 증권사 CMA(종합자산관리계좌) 및 펀드 등으로 이탈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고객들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좋은 금융상품 개발에 온 힘을 쏟고 있다.

소비자를 끌어들이려면 빠르게 바뀌는 금융시장 트렌드를 읽고 때로는 이를 선도해야 한다.

그가 오랜 고민 끝에 올해 내놓은 것은 입출금이 자유로운 고금리 예금 상품.올 상반기 한경소비자대상을 받는 등 소비자들의 호응이 적지 않았다는 그의 표정에서 뿌듯함을 읽을 수 있었다.

"예금 상품은 일단 시작하면 고객이 한 명이라도 있는 한 철회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신중하게 기획해야 하죠.소비자들도 상품에 가입할 때 까다롭게 챙겨봐야 합니다.

금융사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예금도 갈수록 조건이 복잡해지고 있거든요."

그는 한국 금융회사들도 해외 시장에 적극적으로 뻗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싱가포르를 자주 방문하는 것도 선진화된 금융 시스템을 배워 서울을 금융 허브로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어서다.

한국과 해외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겠다는 게 그의 작은 소망이다.

하트레즈씨의 취미는 요리다.

청국장과 김치찌개도 직접 끓여 먹는다.

고향인 테네시주 멤피스 생각이 날 때는 제일 좋아하던 사골 양파수프를 만든다.

"어렸을 때 어머니를 따라 시내에 단 한 곳뿐인 한국식당을 찾곤 했어요.

저도 막상 미국을 떠나오니 어머니처럼 고향 음식이 '땡길' 때가 있더군요."

동네 정육점에서 소뼈를 구해 곰탕처럼 뭉근히 끓이고 야채를 넣는다.

'사골은 비싸서 5만~6만원씩 하지만 잡뼈는 1만원어치면 충분하다'며 알뜰함을 과시했다.

한국에 살아 보니 처음에 이해가 안 되던 것도 공감이 갔다.

대표적인 게 주택 문제.주변에서 자주 '집 언제 살 거냐'고 물어봐서 처음엔 놀랐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도 매일같이 집 장만을 고민한다.

"월세가 보통이 아니더군요.

동부이촌동에 살고 있는데 돈을 모아 좀 더 한국적 느낌이 나는 곳에서 살고 싶습니다.

같이 살 사람도 생겼으니 조금 넓은 집이면 더 좋겠죠."

최근 그는 사랑하는 이와 결혼을 준비하고 있다.

"처가에서 결혼 날짜를 잡는 게 전통이라고 하더군요.

날짜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중인데 왜 이렇게 길게 느껴지나 모르겠습니다.

" 아이는 어떻게 교육시킬까 벌써부터 계획을 꾸며보고 있다는 그의 표정에 설렘이 가득 묻어났다.

좋아하는 일과 사람들이 있는 한 한국을 떠날 생각은 없다.

돈과 명예보다는 행복을 추구한다는 게 그의 인생관이기 때문이다.

그의 소박한 목표를 꽃피울 2008년이 며칠 남지 않았다.

김유미 기자 warmfron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