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숙원 '정치적 통합' 전기 마련

유럽연합(EU)의 새 헌법이 22일 정상회의에서 진통 끝에 타결된 것은 지난 3월 창설 50주년을 맞은 EU의 오랜 숙원인 정치통합의 길을 열은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새 헌법은 2년전 부결된 헌법에 비해 결속력이 느슨한 '미니 조약'의 형태로 부활했음에도 EU 제도의 혁신을 위한 핵심조항들은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부결된 헌법의 핵심 개혁조항을 담은 새 조약이 발효될 경우 당장 국제사회에서 EU의 위상이 높아지고 목소리가 커질 것으로 분석된다.

신설되는 EU 대통령과 외교총책직이 국제사회에서 EU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EU 정책의 일관성을 높여줄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다만 27개국으로 덩치가 불어난 EU의 효율적 의사진행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개혁으로 인식돼온 이중다수결제가 폴란드의 몽니로 도입시기가 당초 2009년에서 2017년으로 한참 미뤄진 것은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유럽합중국'의 원대한 꿈에는 미치지 못해도 국제무대에서 '정치 난쟁이'란 비웃음을 떨쳐버리고 '정치 거인'으로도 갈 수 있는 전기는 마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EU는 창설 50년만에 27개 회원국을 거느린 국내총생산(GDP 세계 최대의 단일시장을 갖춘 '경제적 거인'으로 성장했다.

이제 새 헌법과 함께 정치거인으로 거듭나기 위한 길로 들어서려고 노력할 것으로 전망된다.

마침 50돌을 맞은 EU는 경제성장률이 모처럼 미국을 뛰어넘을 정도로 강력한 회복세를 보이고 있고 개혁마인드로 무장된 새 지도자들을 맞아 한단계 도약할 수 있는 전환점에 서 있기도 하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오는 27일 물러나는 것으로 과거 10년 가까이 유럽을 이끌어온 자크 시라크, 게르하르트 슈뢰더, 블레어 시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뒤를 잇는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내정자 등은 실용주의에 바탕을 둔 개혁적 노선을 추구하고 있다.

또 성장 우선의 경제정책과 친미적인 외교노선을 추구하고 있다는 공통점도 지니고 있다.

이런 시점에 헌법 제정을 둘러싼 오랜 내부 논쟁과 갈등을 마감했다는 사실은 EU의 내부 결속을 한층 다지는 효력을 발휘할 것으로 관측된다.

EU 헌법은 지난 2002년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후 2004년 정상회의에서 헌법 초안을 타결했으나 1년 후인 2005년 프랑스와 네덜란드 국민투표에서 부결됨에 따라 좌초됐다.

새 헌법이 정상회의에서 합의된대로 오는 2009년 상반기 발효될 경우 가까이는 논의가 시작된 이후 7년만에 마무리되는 것이며 멀게는 EU의 미래에 관한 논쟁이 시작된 1991년 마스트리히트 조약 이후 18년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이 오랜 내부 갈등의 요인이었던 새 헌법 조약에 합의함으로써 당장 대외적 신뢰를 높일 수 있을 전망이다.

주제 마누엘 바로수 EU 집행위원장은 "EU가 내부 문제도 해결못하면서 기후변화 등 국제적 도전을 언급할 경우 누가 신뢰하겠느냐"면서 "헌법은 신뢰성의 문제"라고 말했다.

또 헌법논쟁을 마감함으로써 기후변화, 도하협상, 중동평화, 에너지 문제 등 국제현안들을 주도하는 쪽으로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됐다.

내부 갈등을 끝냄으로써 국제적 영향력을 키우는 쪽으로 남는 힘을 밖에서 발휘할 수 있게 됐다는 얘기다.

거꾸로 이번 정상회의에서도 헌법논의에 합의를 도출하지 못했을 경우 그 결과는 끔찍했을 것이라며 EU 관계자들은 안도하고 있다.

이번에도 실패했을 경우 대외적 신뢰성을 상실한 채 끝없는 내부 갈등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또다른 위기에 빠졌을 게 자명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번 합의는 EU의 발목을 잡아온 오랜 내부 논쟁을 마무리하고 밖으로 달려나갈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집안단속에 절반의 성공을 거둔 EU가 밖으로 눈을 돌려 국제무대에서 위상을 높이면서 정치거인의 길로도 성큼 나아갈 수 있을지 주목된다.

(브뤼셀연합뉴스) 이상인 특파원 sangi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