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훈 대법원장이 전국 법원을 순회하면서 판사들을 대상으로 '공판중심주의'와 '구술주의' 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검찰과 변호사를 비하하는 듯한 발언을 쏟아내 법조 3륜이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다.

"밀실수사로 만들어진 검찰 수사기록을 던져버리라"거나 "변호사들이 만든 서류는 대개 사람을 속여 먹으려고 말로 장난치는 것이 대부분이다"는 `강성 발언'도 공판중심주의 제도 도입의 필요성을 강조하다 나왔다.

법조계에 파열음을 울린 공판중심주의나 구술주의는 검찰 조서와 변호사 의견서에 의존하지 말고 법정에서 증인 진술과 피고인 심문을 토대로 진실을 밝힌 뒤 이를 근거로 유ㆍ무죄를 가리고 형량을 정하는 제도이다.

이 제도가 정착되면 검찰과 변호사 입지는 좁아질 수 밖에 없는 게 당연지사.
이 대법원장 '표현 방식'에 검찰과 변호사단체가 강력 반발하는 것도 '발언 취지'인 법정 안 주도권 싸움에서 밀릴 수 없다는 위기감 때문으로 풀이된다.

공판중심주의 강화는 국선변호인 확대 등과 함께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사개추위)의 핵심 개혁과제로, 형사소송법 개정안에 반영돼 국회 계류돼 있다.

그러나 본격 도입하기에는 법원, 검찰 모두 준비가 덜 된 게 사실이어서 앞으로도 이 제도를 둘러싸고 적지 않은 진통이 예상된다.

◇법원도 '걸음마' = 법원이 `조서(調書) 중심'에서 벗어나 형사사건 실체를 공개 법정에서 판단한다는 이 원칙을 구체적으로 적용한 것은 지난해 재판이 진행됐던 강동시영아파트 재건축 조합 비리사건이 사실상 처음이다.

재판부에 검찰이 수사기록을 내지 않아 `백지상태'에서 시작된 이 재판은 법정 변론만으로 판사가 충분히 판결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는 긍정적 평가와 함께 신문내용 중복, 재판 지연 등 비효율성의 문제점도 드러냈다.

재판부는 사전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검찰과 변호인들이 법정에서 생생하게 신문하는 내용만을 토대로 공판을 이끌어갔고 재판 기일을 매주 월ㆍ수ㆍ금요일로 잡아 집중심리를 했다.

그러나 재판 초기 검찰은 피고인측의 증거인멸 시도 방지 등을 이유로 수사기록 뿐 아니라 증인신문 사항도 미리 제출하지 않는 `전략'을 구사하고 변호인측은 검찰 태도가 변호인 방어권을 침해한 것이라며 헌법소원을 제기해 재판이 지연되기도 했다.

재판장 최완주 부장판사는 "철저한 증인 신문이 이뤄졌고 수사기록도 보지 않아 선입견을 배제할 수 있었다"면서도 "쟁점이 아닌 부분까지 법정에서 다루는 등의 `비효율성'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민사ㆍ행정재판에서 공판중심주의와 궤를 같이 하는 구술변론이 도입된 것도 최근이다.

서울행정법원은 지난 3월부터 소송 당사자와 대리인의 주장과 공방을 토대로 사실 관계를 따지는 구술변론 시범 재판부로 5개 합의부를 지정해 운영하고 있다.

이처럼 법원도 공판중심주의나 구술변론에 대해서는 아직 준비가 덜 상태여서 운영 과정에서 어색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검찰ㆍ변호사도 '걸음마' = 검찰도 이들 제도를 '대세'로 여기면서도 생소하기는 마찬가지다.

판사 못지 않은 법률 지식을 갖춘 검사들이 피의자를 조사해 조서를 작성했는데 피고인이 검찰에서의 진술 내용을 법정에서 번복한다는 이유 만으로 조서가 `휴지조각'이 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게 그간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판사가 피고인의 `말'을 듣지 않고 검사가 작성한 `조서'만 보고 재판하는 관행으로는 피고인의 방어권이 보장되지 않고 사건의 실체적인 진실도 왜곡될 수 있다는 논리에 밀리고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조서가 적법하게 작성되고 영상녹화물 등 객관적 증거가 보충되며 변호인 참여 등이 이뤄지면 증거능력을 인정한다'는 취지로 검찰 조서의 증거 인정 기준을 엄격히 제한하는 선에서 사개추위 안이 절충돼 이 마저 거부할 수 없었던 것.
따라서 검찰은 증거분리 제출을 전면 시행하는 등의 대책을 강구 중이다.

증거분리제출은 검찰이 피고인을 기소할 때 공소장(구속 피고인은 영장 첨부)만 제출한 뒤 그 외 수사기록이나 증거물은 필요할 때마다 법정에 내는 것이다.

검찰도 수사 및 재판 환경 변화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고 여기고 나름대로 체질 개선에 나서고 있지만 여전히 관행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 공판중심주의가 정착되려면 = 검찰과 법원은 제도 정착에 서로가 '걸림돌'이 된다고 탓한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검찰과 변호인이 준비 절차에서부터 수사기록을 검토하고 서로 다투지 않는 내용은 사실로 받아들인 뒤 쟁점만 추려내 심리 계획을 세운다면 보다 효율적인 재판 진행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서울중앙지검의 간부 검사는 "이 제도가 정착된 미국도 검찰에서 허위 진술하면 사법방해죄로 처벌하는데 우리는 검찰이나 법정에서 거짓말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여서 범죄가 줄어드는 게 아니라 처벌만 줄고 있다"고 역설했다.

따라서 사법방해죄나 검사의 재량권을 높여주는 플리 바게닝(Plea Bargaining) 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악질 피의자'만 구제하는 제도로 전락한다는 게 검찰 논리이다.

또 공판중심주의 이후 위증사범이 급증하는 것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전문가들은 재판 준비 절차에서 피고인이 수사기록을 열람하게 하거나 신속하게 심리를 할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번 파문이 겉으로는 이 대법원장의 발언에 따른 감정 대립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법원은 '듣기 민망한 말씀'으로 공판중심주의를 정착시킬 수 있다면 밑질 게 없다는 입장이고 검찰과 변호사단체는 '듣기 민망한 말씀'을 걸고 넘어지면 기득권 유지에 도움이 된다는 계산이 어느 정도 깔려 있어 갈등 해소는 당분간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서울연합뉴스) 강의영 기자 keykey@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