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서유럽은 200여년 전보다 왜 더 부유한가? 방대한 식민지경영 덕분인가? 일각에서 아직도 그런 주장이 없지 않다.

하지만 그 답은 무엇보다도 서유럽사회가 과거보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 지식의 총량(분야별 각 개인의 지식의 합)이 팽창했고 늘어난 지식을 생산에 효율적으로 배분하여 경제가 급성장했다.

그런 점에서 서유럽 18세기의 지적 운동인 계몽주의를 살펴보자.

이의 지적 기원은 17세기 F 베이컨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사변적인 중세적 연구방법을 거부했다.

새 지식은 경험적,실험적 연구로 추구될 것을 주장하고 생활에 필요한 실용지식을 강조했다.

또한 당시 현실과 밀접한 과학연구를 통해 물리적 환경을 더 잘 통제하고 이로써 부를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공적,사적인 과학탐구지원을 역설했다.

베이컨에게 지식의 목적은 형이상학적 증명이나 지적 호기심 만족이 아니라 인류의 생활조건 향상이었다.

물론 산업혁명 초기의 기술이 과학혁명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과학혁명과 산업혁명 사이에는 분명 연결고리가 있었다.

계몽주의가 그 역할을 했다.

서유럽 계몽주의의 중심 개념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자연과학의 방식이 인간 삶의 모든 면의 탐구와 이해에 사용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계몽사상가는 모든 것이 이성,즉 합리적,비판적,과학적 사고방식에 맞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에 어긋나는 교회와 계속 충돌했다.

둘째,인간사회에서도 자연처럼 법칙을 발견할 수 있다고 전제했다.

이로써 사회과학이 탄생할 계기를 마련했다.

셋째,진보 개념이다.

그들은 개선된 사회,좀더 나은 인간창조를 인간이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새로운 생활관과 과학혁명 이후의 지적 성과를 결합시키는 일이 계몽주의 세대에게서 일어났다.

서유럽 계몽주의는 소수 엘리트에게 한정된 사건이었지만 결국 산업혁명으로 번질 불길을 점화했다.

이를 테면 예로부터 개별적으로 전수되던 지식전달 방식과 속도가 18세기에 개선되었다.

수학 부호,측량표준화 등 기술언어가 정비되고 기술,지식정보가 문자화되어 필요한 사람이 공개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공공도서관,커피하우스,서적상을 통한 지식전파가 시작되었다.

과학도구,공작기계 등을 취급하는 국제시장도 등장했다.

지식에 대해 비밀주의로 일관한 중세와 달리 17세기부터 지식은 공공재라는 인식이 싹텄다.

지식공유를 위해 통일된 용어와 합의된 표준을 사용한 체계적 보고방식도 도입되었다.

전반적으로 계몽시대 엘리트는 국가적이 아니라 코스모폴리탄적이었다.

일찍부터 외국어 독서의 중요성을 깨닫고 과학,기술서적을 빠르게 번역해 확산시켰다.

계몽사상가의 주요업적인 '백과전서'야말로 직관에서 탈피한 체계적 분석,비밀 전수가 아닌 공개적 접근가능,빠른 검색,체계적인 분류 등 계몽주의 지식전파 유형을 고루 갖춘 대표적 예다.

역사적으로 기술정체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사물을 아는 자'와 '사물을 만드는 자'가 사회적으로 격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접근비용을 감소시키려는 노력이 18세기에 활발했다. 수많은 대학,기술학교,공개강연,각종 학회,학술지,심포지엄 등 지식이동에 헌신하는 제도가 등장했다.

자연철학자와 기업가 간의 사회적 간격이 좁혀졌다.

지식접근비용 감소가 의미하는 바는 지식이 더 많은 정신과 장치에 확산된다는 뜻이다.

단순히 계몽사상의 존재여부만 따진다면 이슬람 계몽주의,중국 계몽주의도 열거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지식이 소규모 전문가에게만 한정되어 있을 때 그것은 소멸될 위험이 크다.

중국,그리스 고전문명의 위대한 발명이 그랬다.

이에 비해 서유럽 계몽주의는 지속가능한 근대적 경제성장으로 번성할 싹을 틔울 씨앗을 뿌렸다.

계몽주의가 정치,사회적 갈등으로 다른 길로 빠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유럽에서는 그러지 않고 뿌리를 내렸다.

지식에 대한 인간정신의 그런 태도 변화가 없었다면 인간생활조건을 개선할 기술적 요소는 블랙박스 안에만 갇혀 있지 않았겠는가.

계몽주의가 승리한 기원을 찾으려면 근대 초 이래 전통을 의문시하는 유럽인 기질의 성장을 이해해야 한다.

베이컨이 그 리더였다.

볼테르,몽테스키외 등 계몽사상가들이 뒤를 이었다.

권위를 비판하는 지식이 이를 누르려는 압력을 극복하고 살아남아 성공한 곳은 유럽뿐이었다.

유럽은 정치적으로 분할되어 경쟁하는 체계였다.

그래서 기성권위가 부여한 '진리'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 박해에 직면하면 다른 권력체계로 이주하여 보호받을 수 있었다.

이성에 대한 믿음이 오랜 세월에 걸쳐 질을 높여 가는 동안 실용지식이 팽창하여 경제성장으로 이어졌다.

그 후 다시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지식경영'에 대한 목소리가 높다.

매우 긍정적인 움직임이다.

서울대 경제학 dyang@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