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 나는 잔병치레로 내내 병실과 방 안에서 조금은 답답하고 외롭고 처연하게 길고 긴 장마와 이어 찾아온 맹렬한 더위를 견디고 있는 중이다.

벼르고 벼르던 끝에 치질 수술을 감행했다.

조짐은 10년 전부터 있어 왔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겨 차일피일 미뤄오다 마침내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병원을 찾게 된 것이다.

수술의 경과는 좋았다.

그러나 체험하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치사한 병은 수술 이후 찾아오는 통증이 문제다.

압정처럼 콕콕 찔러대는 그 통증을 참아내는 일은 여간 고역이 아니다.

오죽하면 배설할 때의 아픔이 두려워 먹기를 망설여야 했을까.

통증과의 싸움도 싸움이지만 이 병은 거동을 불편케 하여 일체의 일상 활동을 중지시킨다.

나는 이 점 때문에 더 힘이 들었다.

왜 그렇지 않은가.

막상 무슨 일이 닥치고 나면 벼르고 있었다는 듯 의무적으로 치러내야 할 일이 마구 생겨나는 형국 말이다.

할 일은 태산같은데 몸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니 속에서 열불이 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덕분에 그간 의무로 마시고 좋아서 마시던 술을 피하게 돼 몸의 장기들 속에 쌓인 노폐물이 빠지고 자연 활력을 찾게 되었으니 아주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부기가 빠진 얼굴도 색이 뽀얘져서 보기에 좋았다.

아니, 소득은 이것만이 아니다.

나는 사소하지만 중대한 이 병을 앓는 동안 일체의 외출을 금하고 모처럼 나와 대면하는 시간을 무한정 갖게 되었다.

무분별하게 좌충우돌 살아온, 지난 날의 내 지리멸렬(支離滅裂)한 생을 돌아보면서 그 생을 살아내느라 낭비가 심했던 몸에 대해 해부학적 성찰을 하게 된 것이다.

다음의 진술은 그 성찰의 내용이다.

날뛰는 치질을 도려내고 집으로 돌아와 파지처럼 널브러져 천장이나 쳐다보고 있자니 참으로 신세가 처량하기 짝이 없는 가운데서도 번쩍 하는 생의 순간적 깨달음이 찾아와 스스로에게 위안을 주었다.

사금파리로 유리를 긁듯 아주 불편한 느낌으로 살을 물었다 뱉는 통증은 결코,뜯기고 찢겨져 비명을 질러대는 항문 탓이 아니라는 것.

지금 항문이 지르는 절규는 사실 따지고 보면 그간 입이 지은 죄를 대속(代贖)하느라 겪는 고통의 표현이라는 것.어찌 입뿐이랴. 눈과 귀와 코,사만팔천 털구멍 등 몸에 난 구멍이란 구멍 속으로 그간 정신없이 들고나다가 회로를 잃은 온갖 잡스런 시뻘건 감각의 욕망들이 병목을 일으켜 육체의 문 앞에서 저토록 분주하다가 기어이 탈을 일으키고 말았다는 것.

그런데 괄약근이 풀어져 팥죽같은 붉은 죄(선혈) 죽죽 쏟는 동안, 존재의 바닥에서 삐그덕대며 닳아서 헐거워진 육체의 문이 앓아대는 동안에도 먹고 마시고 숨쉬고 빨고 보고 듣고 맡느라 온갖 구멍들의 식욕은 식을 줄을 모르고 있지 않은가.

항문의 입장에서 보면 이 얼마나 억울하고 분통(憤痛) 터질 일인가.

생각은 여기에서 단락을 짓지 않고 더 나아가 우리가 사는 세상 어느,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서도 누군가들이 지은 구업들을 대속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것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성당에서 교회에서 법당에서 아무도 몰래 무릎 꿇고 앉아 굽은 등 들썩이며 참회(懺悔)의 긴 기도를 올리는 빛과 소금들이 있어 세상을 아직 살 만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겹쳐 떠오른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구업(口業)을 짓는다.

그러나 자신이 지은 구업에 대해 무감각한 사람이 많은 것은 불행한 일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현실 속에서 가장 무겁게 구업을 짓는 사람들은 힘센 사람들이다.

그들이 지은 구업은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평지풍파(平地風波)를 일으킨다.

그런데도 그들은 구멍의 욕망들을 억제할 줄 모른다.

누군가의 구업 때문에 입이 지은 죄를 대신 앓는 항문처럼 대속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