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라면 따위로 영화사에 길이 남을 '추파'를 던졌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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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윤성은의 Cinema 100
영화 <봄날은 간다>
영화 <봄날은 간다>
“라면 먹을래요?”
영화에서 이만큼 강렬하고도 상대방이 거절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추파는 전무후무하다. 2030 세대들에게는 ‘고양이 보고 갈래?’나 ‘넷플 보고 갈래?’도 통한다지만 라면의 자극적인 냄새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게다가 알다시피 이런 상황에서 ‘먹는다’는 단어는 성행위를 연상시키기도 하니까. 뿐만 아니라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지나간 버스와 여자는 붙잡는 게 아니다’ 등 한 작품 안에 곱씹게 되는 명대사만 여러 개다. 이렇게 절묘한 대사를 쓸 수 있는 감독이라면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할 리 없다.
<8월의 크리스마스>(1997) 한 편으로 아시아 영화계의 스타가 된 허진호 감독은 이처럼 두 번째 장편 <봄날은 간다>(2001)로 각본에 대한 그의 재능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한없이 조심스러웠던 전작의 로맨스와 달리 이 영화는 연애의 맵고 알싸한 맛을 가감 없이 보여주었고, 사랑의 격랑을 경험해본 성인들에게 보다 현실적인 멜로드라마로서 공감을 얻었다. <8월의 크리스마스>가 첫사랑과 마지막 사랑을 교차시키면서 눈물을 유도했다면 <봄날은 간다>는 멜로드라마의 전복된 성역할이 만든 블랙코미디에서 웃음기를 덜어내고 쓰큼한 뒷맛을 남긴 작품이다. 녹음기사인 ‘상우’(유지태)는 일을 하면서 만난 지방 라디오 PD이자 진행자 ‘은수’(이영애)에게 빠져든다. 은수는 상우보다 나이도 많고, 일에서도 선배이며, 이미 결혼과 이혼의 경험도 있다. 모든 면에서 성숙하고 능숙해 보이는 은수는 상우와의 관계도 리드해 나간다. 은수 캐릭터는 초반부터 매우 섬세하게 빌드 업되는데, 대합실에 앉아서 졸고 있는 장면이나 남자보다 큰 사발면을 비우는 장면, 상우에게 자고 가라고 하는 장면 등은 그녀가 남의 눈을 별로 의식하지 않는 대범한 여성임을 알려주면서 관객들에게 소소한 웃음을 유발시키기도 한다. 그만큼 당시 한국 사회에서, 그리고 한국 영화에서 통용되던 남녀의 성역할은 이 영화에서 완전히 무시된다. 은수는 소위 ‘쿨’한 여성으로 묘사되고, 상우도 은수의 그런 모습에 매력을 느낀다. 그러나 그녀는 상우와 연인 관계라는 걸 회사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 하는 장면에서 평범해진다. 주인공 개인의 욕망이 사회적 금기나 관념을 완전히 넘어서지 못한다는 점은 고전 멜로드라마의 컨벤션이기도 하다. 여기서 은수는 <엽기적인 그녀>(2001)에서 오랫동안 남자를 쥐고 흔들다가 클라이맥스에서 ‘나도 어쩔 수 없는 여자인가 봐’라고 고백하는 ‘그녀’의 30대 버전처럼 보인다.
물론, 그녀의 결혼 트라우마나 배우자의 조건을 따지는 심리 중 어느 것도 비난의 대상은 될 수 없다. 그러나 그녀가 금세 다른 사람과 연애를 시작한다는 점에서 그녀의 사랑은 상대적으로 가볍게 느껴지고 상우의 순애보는 더욱 안타깝게 다가온다. 특히, 흔들리는 마음의 온도를 상우에게 날 것 그대로 표출하는 은수는 변덕스럽고 자기중심적인 인물일 뿐이다. 한편, 이별 앞에서 쿨하지 못한 것은 상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헤어진 연인을 불쑥 찾아가 재워달라고 하기도 하고, 그녀의 집 앞에서 밤을 새우다가 들키기도 한다. 급기야 운전을 가르쳐주었던 자신을 두고 임시번호판이 붙은 차를 운전해 다른 남자를 만나러 가는 은수 앞에서 상우는 자멸하고 만다. 그가 은수의 새 차에 상처를 내는 장면은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다림’(심은하)이 굳게 닫힌 ‘정원’(한석규)의 사진관에 돌을 던지는 장면과도 유사하지만 훨씬 미성숙한 행위임은 분명하다.
이들이 가까워질 때는 모든 게 눈 내리는 소리처럼 고요하면서 은근했는데, 이별은 장맛비처럼 꽤 요란스럽다. 시간이 흐른 후, 은수는 다시 상우를 찾아간다. 그러나 이미 사랑은, 아니 버스는 떠난 후다. 상우는 은수를 완전히 떠나보낸 후에야 다시 혼자 소리를 녹음하며 평온한 미소를 짓는다. 한층 성숙해진 상우의 마지막 모습 때문에 관객들은 이들의 이별을 ‘추억’으로 받아들이고, 그에게 다시 봄날이 올 것임을 직감한다. 완전한 이별은 새로운 만남의 전제이므로. ‘봄날은 간다’는 이전까지 그 어떤 한국 영화보다 사운드에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기도 하다. 대나무가 흔들리는 소리, 눈 밟는 소리, 비 내리는 소리 등이 강조되는 신들은 조성우 음악감독의 중독성 강한 멜로디가 흐르는 장면과 대비되면서 현장감을 더한다. 또한, 이 영화는 <8월의 크리스마스>와 마찬가지로 클로즈업을 가능한 배제하고 두 남녀, 혹은 배경과 인물의 관계성을 드러내는 촬영 방식을 사용했다.
그러나 동일인의 솜씨는 아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의 유영길 감독은 이 작품의 개봉을 보지 못하고 63세의 나이로 영면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부터 한국영화사에 한 획을 그었던 작품들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영화인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었던 인물인 만큼 <봄날은 간다>에는 유영길 감독의 시선에 대한 탐구와 오마주도 발견할 수 있다. 정확한 이미지에 섬세한 소리가 만났으니 금상첨화(錦上添花)다. 중년들의 인생작으로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윤성은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