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휴 교수의 경제사 산책] 美동북부의 초기공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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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면기 발명으로 유명한 엘리 휘트니란 미국인이 있었다. 1802년 어느 날 그는 자신이 만든 여러 모양의 소총 부품이 담긴 상자를 들고 워싱턴 DC에 나타난다. 소총 1만자루를 정부에 납품한다는,2년여 전의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대통령(J Adams) 앞에서 아무 상자에서나 무작위로 부품을 꺼내 다른 총 부속과 갈아 끼우는 시범을 보였다. 당시 무기 공장은 소총을 1년에 고작 250자루 제작했다. 총마다 하나하나 따로 만드는 수제품이라서 만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고장이 나면 쓸모가 없었다. 그럴 때 휘트니의 소총은 부품만 교체하면 되었다.
총포산업에서 부품표준화와 호환성 원리를 도입하는 '미국식 제조업 체계'가 주목받는 순간이었다. 이 방식은 공작기계 산업으로 연결되고 자전거,자동차,기계도구 부문에 확산되면서 미국의 산업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미국은 땅이 넓어 자연조건의 분포가 다양했으므로 지역경제도 그에 상응해 발전했다. 미국의 공업화는 1830년대 뉴잉글랜드(동북부)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동북부는 당시 경제여건에 자극받아 공장,제조업에 일찍 투자했다. 남부경제의 근간은 흑인 노예노동을 이용한 상품작물(면화 담배 쌀 사탕 인디고) 플랜테이션이었다. 중서부는 밀.옥수수 경작과 소.돼지 축산을 포함한 대규모 가족농업이 주류였다.
문화적으로도 달랐다. 미국 사람들은 악착같이 돈을 벌려는 동북부의 사람들을 '양키'라 불렀다. 지금도 '양키'는 동북부 사람들에 대한 다른 지역 미국인의 지역감정이 담긴 표현이다. 동북부에 정착한 '양키'는 지역경제 특성상 미국의 독립과 연방제 확대의 혜택을 크게 받았다. 지방자치적 민주주의에서 중앙집권이 강화되는 쪽으로 진행돼 온 미국의 역사에서 연방정부의 강화란 미국 내 서로 다른 지역경제를 통합해 자유무역지대로 만들어간다는 뜻이기도 했다. 통화통합은 매우 늦다. 이후 자본과 노동이동,비교우위에 따른 지리적 특화가 더욱 진행되었다.
미국도 직물이 초기공업화를 선도한다. 산업발달의 규모 순으로는 면방직,구두,남성피복,목재 등이며 나중에 제철,기계가 가세한다. 일찍이 영국에서 이민 온 슬레이터(S Slater)가 동부의 로드아일랜드에 공장을 세우고 영국에서 쓰던 방적기를 설치했다(1793). 또한 로웰(F C Lowell)은 보스턴의 부유한 상인자본을 동원해 매사추세츠에 보스턴제조회사를 세웠다(1813). 의류제조의 모든 공정을 기계화하고 표준생산,단일판매대리점,기숙사제도를 도입한 이 회사는 이후 뉴잉글랜드 공장들의 모범이 되었다. 주변 농촌에서 일자리를 찾아 나선 젊은 여성과 아일랜드 출신 이민노동자가 이곳에서 일했다.
면직공장의 성장과 함께 자본시장에서 주식거래가 시작된다. 주식투자자는 다양했다(상인이 50%,전문직 종사자,제조업자,장인,금융가,금융기관,신탁회사,여성단체 등). 공장의 자금조달방법은 주로 주식발행이었다. 보스턴 증권거래소가 뉴욕보다 일찍 성황을 이루었다. 소규모 회사 투자자금은 은행에서 조달됐다. 그 당시 은행들은 주 경계를 넘어 영업할 수 없었고 지점설치도 금지되어 있었다. 이 단점으로 은행은 주로 은행의 관련자에게 대부했다. 이사는 은행을 금융중개기관으로 경영하는 것이 아니라 은행을 통해 자기네 자금을 조달했다. 소위 내부여신(insider lending)이다. 요즘 같으면 법에 저촉되지만 당시는 예금자,은행,투자자가 서로 믿고 자본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며 운영되었다. 물론 이것은 연방규제가 영향력을 미치기 전에 쇠퇴했다.
남부는 상대적으로 공업화가 느렸다. 노예제 방식으로 면화생산에서 엄청난 수익을 올리던 농업경영자(플랜터)들은 농산물 생산,가공,유통과 관련되지 않은 투자에는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공업화도 편향적으로 이루어졌다. 남북전쟁에 돌입할 무렵 남부의 중화학공업 생산능력은 패전을 예견할 수 있을 만큼 북부에 비해 뒤떨어졌다. 남부경제가 뒤진 데는 남북전쟁 이후 남부에 대한 북부의 정치적 핍박 탓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부의 경제적 근간인 플랜테이션 농업,이와 관련된 산업 등이 붕괴한 탓도 컸다. 북부와 남부 간 소득격차가 회복되는 데는 100년 이상이 걸렸다. 이 회복에는 석유,우주항공,레저산업에 힘입은 바 크다.
한 나라 안에서도 지리적,부문별,불균형 성장이 발생한다. 이탈리아,터키 등 다른 나라의 예도 많다. 거기에서 발생하는 폐해도 크다. 그렇다고 해서 지역적 불균등 발전을 위로부터 인위적으로 통제하려는 노력이 성공한 예는 드물다. 지방자치제와 국가균형발전이 서로 상충되는 개념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서울대 경제학 dyang@snu.ac.kr
총포산업에서 부품표준화와 호환성 원리를 도입하는 '미국식 제조업 체계'가 주목받는 순간이었다. 이 방식은 공작기계 산업으로 연결되고 자전거,자동차,기계도구 부문에 확산되면서 미국의 산업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미국은 땅이 넓어 자연조건의 분포가 다양했으므로 지역경제도 그에 상응해 발전했다. 미국의 공업화는 1830년대 뉴잉글랜드(동북부)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동북부는 당시 경제여건에 자극받아 공장,제조업에 일찍 투자했다. 남부경제의 근간은 흑인 노예노동을 이용한 상품작물(면화 담배 쌀 사탕 인디고) 플랜테이션이었다. 중서부는 밀.옥수수 경작과 소.돼지 축산을 포함한 대규모 가족농업이 주류였다.
문화적으로도 달랐다. 미국 사람들은 악착같이 돈을 벌려는 동북부의 사람들을 '양키'라 불렀다. 지금도 '양키'는 동북부 사람들에 대한 다른 지역 미국인의 지역감정이 담긴 표현이다. 동북부에 정착한 '양키'는 지역경제 특성상 미국의 독립과 연방제 확대의 혜택을 크게 받았다. 지방자치적 민주주의에서 중앙집권이 강화되는 쪽으로 진행돼 온 미국의 역사에서 연방정부의 강화란 미국 내 서로 다른 지역경제를 통합해 자유무역지대로 만들어간다는 뜻이기도 했다. 통화통합은 매우 늦다. 이후 자본과 노동이동,비교우위에 따른 지리적 특화가 더욱 진행되었다.
미국도 직물이 초기공업화를 선도한다. 산업발달의 규모 순으로는 면방직,구두,남성피복,목재 등이며 나중에 제철,기계가 가세한다. 일찍이 영국에서 이민 온 슬레이터(S Slater)가 동부의 로드아일랜드에 공장을 세우고 영국에서 쓰던 방적기를 설치했다(1793). 또한 로웰(F C Lowell)은 보스턴의 부유한 상인자본을 동원해 매사추세츠에 보스턴제조회사를 세웠다(1813). 의류제조의 모든 공정을 기계화하고 표준생산,단일판매대리점,기숙사제도를 도입한 이 회사는 이후 뉴잉글랜드 공장들의 모범이 되었다. 주변 농촌에서 일자리를 찾아 나선 젊은 여성과 아일랜드 출신 이민노동자가 이곳에서 일했다.
면직공장의 성장과 함께 자본시장에서 주식거래가 시작된다. 주식투자자는 다양했다(상인이 50%,전문직 종사자,제조업자,장인,금융가,금융기관,신탁회사,여성단체 등). 공장의 자금조달방법은 주로 주식발행이었다. 보스턴 증권거래소가 뉴욕보다 일찍 성황을 이루었다. 소규모 회사 투자자금은 은행에서 조달됐다. 그 당시 은행들은 주 경계를 넘어 영업할 수 없었고 지점설치도 금지되어 있었다. 이 단점으로 은행은 주로 은행의 관련자에게 대부했다. 이사는 은행을 금융중개기관으로 경영하는 것이 아니라 은행을 통해 자기네 자금을 조달했다. 소위 내부여신(insider lending)이다. 요즘 같으면 법에 저촉되지만 당시는 예금자,은행,투자자가 서로 믿고 자본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며 운영되었다. 물론 이것은 연방규제가 영향력을 미치기 전에 쇠퇴했다.
남부는 상대적으로 공업화가 느렸다. 노예제 방식으로 면화생산에서 엄청난 수익을 올리던 농업경영자(플랜터)들은 농산물 생산,가공,유통과 관련되지 않은 투자에는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공업화도 편향적으로 이루어졌다. 남북전쟁에 돌입할 무렵 남부의 중화학공업 생산능력은 패전을 예견할 수 있을 만큼 북부에 비해 뒤떨어졌다. 남부경제가 뒤진 데는 남북전쟁 이후 남부에 대한 북부의 정치적 핍박 탓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부의 경제적 근간인 플랜테이션 농업,이와 관련된 산업 등이 붕괴한 탓도 컸다. 북부와 남부 간 소득격차가 회복되는 데는 100년 이상이 걸렸다. 이 회복에는 석유,우주항공,레저산업에 힘입은 바 크다.
한 나라 안에서도 지리적,부문별,불균형 성장이 발생한다. 이탈리아,터키 등 다른 나라의 예도 많다. 거기에서 발생하는 폐해도 크다. 그렇다고 해서 지역적 불균등 발전을 위로부터 인위적으로 통제하려는 노력이 성공한 예는 드물다. 지방자치제와 국가균형발전이 서로 상충되는 개념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서울대 경제학 dyang@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