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본격적인 공업화에 돌입하는 지역이 부쩍 늘면서 소위 짝퉁제조,첨단기술유출,산업스파이에 관한 뉴스도 더 빈번해지는 느낌이다.

'기술절도행위'는 19세기 유럽의 산업혁명기에도 있었다.

영국 산업혁명 이후 유럽 대륙(후발 공업국)의 공업화 패턴에 관해서는,그 자체로뿐만 아니라 제 3세계의 물질적 개선책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는 시도로서도 활발한 논의가 있어왔다.

이를 살피면 최초의 산업국 영국이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공업화를 위해 영국식 모델에 따를 필요가 없고 여러 대안을 고려할 수 있음도 확인된다.

공업화 패턴이 다양했다는 것은 공업화가 자동적으로(혹은 '역사발전법칙'에 따라)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1750년에 영국과 후발공업국의 공업화 수준은 거의 비슷했다.

1800년 무렵 영국이 선두주자로 나서면서 1860년까지 영국과의 격차가 점점 커진다.

후발공업국 공업화의 시기와 정도는 다양했다.

철,석탄 자원이 풍부한 벨기에는 영국 신기술 도입의 선구자였다.

프랑스의 공업화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져 기계화와 공업산출 면에서 급격한 분출이 없었다.

이러한 프랑스식 공업화 패턴은 공장도시의 열악함을 피하는 좋은 사례로 주장되었으나 1860년 이후 독일,미국이 괄목할 성장을 보이면서 그 의미가 퇴색했다.

1913년 무렵이면 대량생산에서 독일이 영국을 맹추격하고 미국은 이미 1인당 생산이 영국을 능가한다.

영국의 공업은 1789∼1815년에도 계속 성장했다.

같은 시기 유럽대륙에서는 프랑스혁명의 소요로 교역손실,인플레이션,사회불안이 일고 나폴레옹전쟁으로 영국과 대륙 간 교통이 단절되면서 1815년에 유럽~영국 간 격차는 예전보다 더 벌어졌다.

이후 기계화로 영국 상품이 세계시장을 완전히 지배하자 대륙은 영국과 경쟁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하지만 1815년 이후 유럽 후발공업국에는 공업화추진에 후발주자가 누릴 수 있는 이점이 생겼다.

우선 후발공업국은 영국의 신기술과 자본을 이용할 수 있었다.

2차대전 후 유럽과 일본이 미국을 따라잡는 과정도 이와 유사하다.

물론 이 일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영국은 특히 신기술의 해외유출을 막기 위해 1825년까지 숙련기술자의 출국을 법으로 금했다.

1843년까지 직조기계,기타 장비수출도 불법이었다.

하지만 랭카셔 출신 목수 코커릴(W.Cockerill)은 1799년에 아들과 함께 몰래 프랑스령 벨기에로 빠져나가 면방적 장비를 만들었다.

그의 아들이 벨기에 남부 리에쥐에서 기계,증기엔진,철도기관차를 만드는 공장을 건설하자(1817년) 영국의 숙련기술자들이 코커릴과 함께 일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나폴레옹전쟁기에 프로이센의 육군장교로서 영국에서 복무하던 하코트(F.Harkort)도 증기기관을 들여온 독일 기계공업의 선구자였다.

당시 독일의 도로사정이 나빴기 때문에 부품을 해체해 옮겨와 다시 조립해 판매했다.

미국 기업가 로웰(F.C.Lowell)도 1810년 영국여행을 하는 도중 카트라이트 역직기의 핵심기술을 암기해 미국에 유출시켰다.

그가 세운 보스턴공업사는 원면부터 완성 의류까지 모든 공정을 감당하는 세계 최초의 일관직물공장이었다.

영국공장을 모델로 했지만 이를 개량한 설비였다.

그는 또한 일반에게 주식을 팔아 공장운영자금을 모은 근대적 기업금융의 선구자였다.

이들은 요즘 관점에서 보면 당시의 첨단기술을 해외로 빼돌려 복제한 범법자들이지만 역사적으로는 산업혁명을 확산시킨 일등공신들이었다.

영국과 달리 후발공업국은 공업화 추진에서 정부 역할도 컸다.

1815년이후 후발국정부는 도로,운하를 건설하고 대륙공업화의 선도부문인 철도건설비용도 상당 수준 부담했다.

중공업 위주의 공업화에는 자금소요도 커서 은행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30년대 벨기에의 두 은행이 이 면에서 선구자다.

은행이 유한책임회사로 설립되어 위험부담이 줄자 많은 투자자가 모였으며 산업발전에 기여할 수 있었다.

이와 유사한 은행이 1850,60년대 프랑스,독일에서도 정부와 협력하여 철도,중공업부문의 회사를 지원했으며 점차 유한책임회사로 조직되었다.

공업화가 더 늦은 러시아나 일본은 정부가 기술도입,외자유치에 더 적극적이었다.

즉,민간기업이 스스로 꾸려나갈 수 있을 때까지 정부와 은행이 나서준 것이다.

지금 초고속으로 성장하는 중국과 인도 역시 정부주도로 직접투자(FDI)나 아웃소싱을 유치하고 있다. 늦게 출발할수록 다양한 형태의 능동적인 정부개입이 공업화 초기에 필요하고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후 민영화하는 방식이 일반적인 듯하다. 이를 위해 시장이 원활히 굴러가도록 법과 제도를 정착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최초의 산업국 영국은 이런 면에서도 예외적이었다.

투명한 정부와 재산권 존중이 뿌리내리면 짝퉁도 자연히 사라질 것이다.

/서울대 경제학 dyang@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