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기술을 개발해 최초로 시장을 개척한 기업(first mover)은 항상 승자가 될 수 있을까.

후발 주자에게도 기회는 주어질까.

정보기기(IT) 기업들을 고민하게 만드는 숙제다.

시장 개척 기업은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지만 자칫 좁은 안목으로 인해 거대한 시장을 후발 업체에 넘겨주고마는 사례도 적지 않다.

최근 MP3플레이어 특허 관련 법정 싸움을 벌이기 시작한 미국 애플컴퓨터와 싱가포르 크리에이티브도 역시 같은 사례로 볼 수 있어 세계 업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싱가포르 크리에이티브 테크놀로지는 2000년 하드디스크형 MP3플레이어를 처음 발명한 회사다.

'노매드'라는 브랜드로 세계 시장에 첫선을 보였다.

애플의 아이팟은 2002년에 나온 제품.아이팟이 명백한 후발 브랜드였다.

그러나 4년 넘게 흐른 지금,세계 MP3플레이어 시장은 아이팟이 거의 독식하고 있다.

올 들어 4월까지 애플은 판매량 기준으로 미국 MP3플레이어 시장의 77%를 차지했다.

크리에이티브 리오 아이리버 소니 등 나머지 4개 업체는 각각 10% 미만의 점유율에 만족해야 했다.

크리에이티브는 특히 지난 1분기에 최악의 실적을 기록했다.

노매드 판매량이 전분기 대비 51% 급감했다.

이익도 1억1430만달러 적자를 기록하고 말았다.

어쩌다 이런 '억울한' 일이 벌어졌을까.

'제2의 노매드' '제2의 크리에이티브'가 되지 않으려면 어떤 경각심을 가져야 할까.

월스트리트저널은 이와 관련,엔지니어가 설립한,엔지니어가 운영하는 IT 기업의 맹점을 지적하고 있다.

크리에이티브는 기술 개발에만 집중하는 테크놀로지 기업의 전형이라는 것이다.

기술이 중요하지 마케팅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다.

크리에이티브 창립자인 심웡후씨는 공석에서 "마케팅에 돈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고 말할 정도였다.

실제로 크리에이티브는 브랜드 마케팅에 거의 투자하지 않았다.

또 하드디스크형 MP3플레이어를 일반 대중들에게 어떻게 소개하고 광고해야 할지 방향을 잡지도 못했다.

2004년까지는 TV광고도 하지 않았다.

작년부터 마케팅에 돈을 풀고 있지만 너무 늦은 선택이었다.

아직 보수적 자세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도 문제다.

이 회사는 첫 TV광고를 제작하면서 싱가포르의 광고회사를 선택했다.

광고 방영 지역도 일부 아시아 시장에 국한시켰다.

미국에서 잡지와 옥외광고는 하고 있지만 TV광고는 아직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애플의 등장과 급성장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콧방귀를 뀌었다.

자신들의 기술을 그저 베낀 것으로 봤기 때문.크리에이티브의 과도한 자신감은 '사운드 블래스터'라는 사운드카드를 개발해 대성공을 거두면서 생겨난 고질병이었다.

애플은 2001년 초에 크리에이티브 기술의 라이선스 계약을 맺거나 크리에이티브가 휴대용 디지털 미디어 플레이어 사업을 분사할 경우 분사 업체에 투자하겠다는 의향을 밝혔다.

그러나 크리에이티브는 '노(NO)'하고 말았다.

세계에서 가장 마케팅이 뛰어난 회사인 애플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그만큼 크리에이티브가 마케팅에서는 '숙맥'이었다는 얘기로 풀이할 수 있다.

크리에이티브는 결국 법정 싸움에 기업 운명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지난달 1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연방법원에 애플이 자신들의 내비게이션 기술과 음악 접근 방식 등의 특허를 침해했다고 제소했다.

애플도 미국 위스콘신주 매디슨 지방법원에 크리에이티브가 애플의 특허 4가지를 침해했다고 맞고소했다.

어떤 결론이 나올지 아직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명백한 것은 시장 개척자가 해당 기술을 상용화하지 못함으로써 좋은 아이디어를 어떻게 썩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장규호 기자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