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감대응 체제를 구축하라.'1993년 이후 '기술경영' '준비경영' '시나리오경영' '월드베스트' 등 숱한 경영화두를 던지며 그룹을 이끌어왔던 이건희 삼성 회장이 최근 '민감대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지난 3월 말과 4월 초 전자계열사 사장단에 이어 지난 9일 금융계열사 사장단으로부터 각각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던진 화두다.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는 환율과 국제 유가,미국과 일본 업체들의 거센 추격과 견제,반(反)기업정서 확산 등 최근 삼성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환경이 급변하고 있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라고 삼성 측은 설명했다.

이 회장은 특히 금융계열사 사장들로부터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민감대응체제 구축을 통해 경영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변화와 혁신을 시도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아이디어를 경영에 적극 반영하라"고 강조했다.

구체적으로 이수창 삼성생명 사장에게는 "규모와 덩치에 걸맞은 새로운 사업을 찾아서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하라"고 지시했고 황태선 삼성화재 사장에게는 "교통사고 사망률을 선진국 수준으로 낮추면 회사의 이익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안전에도 큰 도움이 되니 좋은 아이디어를 마련해 보라"고 당부했다.

또 카드 증권 투신 등의 계열사에 대해선 견실경영을 강조하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고객들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열린 전자계열사 사장단 업무보고에서도 이 회장은 특유의 위기의식을 내비치면서 국민들로부터 사랑받는 기업으로 거듭날 것을 당부했다.

그는 전자계열 사장들에게 "삼성이 경제에 대한 기여도가 높다고 안심할 것이 아니라 감성적으로도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기업이 돼야 경영 외적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전자 계열사의 한 사장은 "회장님의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공룡이 왜 갑자기 멸종했는지를 반면교사로 삼으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이 회장의 상황 인식은 지난 2월4일 귀국 당시 "그동안 국제 경쟁이 심해 1등 상품을 만드는 데만 신경쓰다 보니 삼성의 조직이 비대해져 느슨해진 것을 느끼지 못했다"고 소회를 피력한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삼성은 그동안 이 회장 일가의 사재 출연과 옛 구조조정본부의 축소 개편,그룹 차원의 사회공헌 사업 확대 등을 통해 '대국민 약속'을 착실하게 이행하고 있지만 외부환경 변화에 따른 이 회장의 긴장감은 아직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는 게 그룹 안팎의 전언이다.

한편 이 회장은 다음 달 20일께 제일모직 중공업 에버랜드 등 나머지 계열사 사장단과의 면담을 마지막으로 그룹 경영 현안 점검을 마칠 예정이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