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엽 < 청주대 교수·정치외교학 > 지난 25일은 21년간 장기 집권한 마르코스 독재정권을 피플파워로 상징되는 시민혁명으로 몰아내고 필리핀에서 민주주의가 회복된 지 20주년이 되는 날이다. '제3의 물결'의 저자인 새뮤얼 헌팅턴은 20세기 후반 아시아에서의 민주화 물결을 설명하면서 1986년 필리핀의 피플파워가 주변국가들에 민주화에 대한 열정과 희망을 불어넣었다고 쓰고 있다. 실제로 한국에선 민주화 운동이 1987년 6ㆍ29선언을 이끌어냈고, 1988년에는 대만에 지속되던 계엄령이 해제되고 민주화의 초석을 놓았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미얀마와 중국 본토에서의 민주화 운동도 그 원동력의 근원을 필리핀 피플파워에서 찾을 수 있다. 이처럼 타 국가에 전시효과를 나타내며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필리핀의 피플파워는 아이로니컬하게 2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듯하다. 아로요 대통령 가족들의 부정부패와 2004년 선거부정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팽배해 있는 상황에서 막대한 인명피해를 가져온 레이테섬 남부의 산사태는 필리핀 정국을 더욱 혼미하게 하고 있다. 지난해 7월 국민들의 시위가 극심했던 때에도 경찰의 시위진압에 최소의 대응(maximum tolerance)을 지시했던 아로요 대통령이 지난주에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강력하게 대응하는 것은 나름대로 현재의 위기상황을 정면으로 돌파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명이라 볼 수 있다. 지금의 필리핀 사태를 20년 전 반마르코스 운동과 비교해 보는 시각이 있다. 현재 필리핀에서 일고 있는 대중시위의 주도세력들은 20년 전이나 별반 다를 바 없으나 그 이면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아키노 전 대통령을 위시한 엘리트 계층은 아로요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지만, 마땅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여서 강력한 지도력을 보이는 데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또한 필리핀 민중들의 좌절감을 대변하고 있다는 좌파계열의 단체들은 인적ㆍ물적 자원의 부족뿐만 아니라 전통적 엘리트계층과 군부의 견제로 인하여 시민혁명을 독자적으로 이끌기에는 무리가 있다. 두 차례의 피플파워에서 성공의 열쇠를 쥐었던 군부가 현재에는 아로요 정권에 충성을 나타내면서 내부적으로 일부 쿠데타 움직임을 진화하는 등 이탈의 움직임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상황들이 아로요 정권으로 하여금 일부 반정부 움직임에 대해 강경한 대응을 할 수 있도록 한 배경이 됐을 것이다. 이처럼 20년 전 반독재라는 공통의 목표를 향해 결집했던 이들 세력들이 지금은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다. 필리핀 피플파워를 미완의 혁명으로 묘사하는 데는 혁명의 결실이 일반 민중들에게 돌아가지 못한 데에 기인한다. 1986년 피플파워를 통해 독재정권을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이루었지만,이는 전통적 엘리트들의 전면 복귀를 낳는 계기가 됐을 뿐 거리를 행진하던 민중들의 목소리는 이후 수립된 민주주의 정권에서 담아내지 못했다. 빈부의 격차는 더욱 커졌고 지속적인 경기침체로 인해 빈곤층은 더욱 확대됐다. 그처럼 애타게 바라던 민주주의도 필리핀 민중들의 편은 아닌 듯하다. 아직도 많은 필리핀 국민들이 오히려 마르코스 독재시절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는 것을 보면 민주주의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2001년 또 다른 피플파워를 통해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을 몰아냈지만 새로이 들어선 정권 또한 부정과 부패로 얼룩져 국민적 저항에 직면하고 있다. 오늘도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배회하는 필리핀 국민들이 꿈꾸는 진정한 민주주의 혁명이 하루 빨리 완성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