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지하철 2호선 성수역 인근 뚝섬우체국 맞은편.6층짜리 허름한 건물 출입구에 목각인형이 새겨져 있다.


'일러스트레이션 교육원'이란 간판에 디자인을 전공한 신세대 멋쟁이가 원장일 것 같다는 기자의 상투적인(?) 생각은 문을 여는 순간 여지없이 빗나간다. 수염도 깎지 않은 덥수룩한 40대 4인방이 신세대 여성이 대부분인 제자들과 어울려 동화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꼭두는 학원이라기보다는 추계예술대 동양화 서양화 전공 20년지기들이 지난 2005년 1월 의기투합해 만든 그림 동화운동본부나 다름없다.


◆상상력의 빈곤에 맞서서


꼭두는 목각인형을 뜻하며 '처음을 알리는 시작'이란 의미도 갖고 있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상상력을 발휘하고 자신을 개발하는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최민오씨(41)가 꼭두에 대해 부연설명을 한다. "나 스스로 정체되었다고 느낄 때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부터 새로운 스타일을 계속해서 시도하고 학생들에게도 그것을 유도하지요."


고광삼씨(41)는 출판사에서 13년을 일하다 이곳에 합류했다. "외국 그림 모사에 치우쳐 창의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우리 일러스트레이션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선 신세대에 기대하는 게 지름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한병호 원장(45)을 주축으로 뭉친 4인방은 신세대 일러스트레이터 발굴을 위해 학원을 차렸을 뿐 장사와는 거리가 멀다.


우선 교육기간이 1년으로 긴 데다 소수정예로 운영하는 까닭에 1기 수료생이 50여명밖에 안 된다. '이래도 먹고 사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한 원장은 "그림동화운동을 하는데 배가 고픈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며 웃는다. 고액과외 한 과목 수업료에도 못 미치는 월 30만원을 받아선 학원 임대료와 관리비를 감당하기도 힘든다. 1억2000만원으로 창업했는데 벌써 적자가 쌓여 임대보증금을 까먹고 있다.


박철민씨(41)의 경우 몇 푼 되지 않는 강사료를 받아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금전적으로 지원까지 하다 보니 차비도 빠지지 않는 밑지는 장사(?)다. 그럼에도 박씨는 "애초부터 젊은이들과 함께 즐겁게 생각하고,상상하고,그리는 게 목표였다"며 "학생이 있는 한 수업은 계속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모두가 학생,모두가 원장


창작동화는 최씨,세밀화 묘사는 고씨,전래동화는 박씨가 돌아가며 가르치고 한 원장은 이를 바탕으로 주제를 설정해 동화로 풀어나가는 법을 가르친다.


교실로 들어가 보면 학생들이 그린 누드 크로키가 온통 벽에 붙어 있다. 동화 그림에서도 조형성을 키우기 위한 기초는 크로키이기 때문.지난달 졸업한 1기생들은 20대가 주축이지만 43세 늦깎이도 있다.


학생들이 세대도 다르고 출신 배경도 다양하기 때문에 개인의 장점을 최대한 이끌어내는 교육 방식을 적용한다.


첫 입학생 중 대학 전공이 미술쪽과는 전혀 무관한 여학생이 있었다.


그녀는 임신한 몸으로 학원을 다니며 졸업작품을 완성했다고 한다. "이런 후배들의 열성에 보람을 느끼며 가르치는 거죠." 최씨의 말에 졸업생 김선주씨(26·여)가 거든다. "스스로 깨치게 기다려주시는 선생님들의 인간적인 교습법으로 인해 모두가 동화그림에 빠져들었습니다."


◆새가 되고 싶은 사람들


이 인간적인 4인방은 실은 이 분야의 국내 최고급 프로들이다. 한 원장은 '새가 되고 싶어'(캐릭터플랜,2004년 발간)로 2005년 BIB 골든 애플상을 수상했다.


슬로바키아 화단이 주관하는 BIB(Biennale of illustaration in Bratislava) 상은 일본 등 외국에서는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국내에선 이런 풍토 조성이 아직 멀었다.


"일러스트레이터도 당당하게 하나의 장르로 인정받아야 하고 또 프로정신을 발휘해야 하는데,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한 원장은 "시장이 좁다 보니 학습지 등이 차지하는 비중이 60~70%나 된다"며 "어린이보다 기성세대의 취향에 맞는 소수의 매체를 통해 일러스트레이션을 전파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아쉽다"고 말했다.


학원 벽 곳곳에 새가 그려져 있다.


고씨는 "그림 속의 새가 뛰쳐나와 훨훨 날 수 있도록 즐거운 상상력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것이 사명"이라고 말했다. 옆에서 크로키를 하던 최보람씨(24·여)가 "삼성이 8000억원을 사회에 환원한다고 하는데,우리 선생님들이야말로 그런 지원을 받을 만한 분들이 아닐까요"라며 동화 속 주인공 같은 밝은 웃음을 짓는다.


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