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철 < 한양대 석좌교수 - 서울대 명예교수 >


21세기는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 경쟁력의 원천이 되는 시대,그래서 그것을 축적한 자는 승자가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패자가 되는 시대라고 말한다.


승자가 되려면 사회적 자본이 무엇이며,그것을 어떻게 배양 혹은 축적해야 할지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해선 자본 개념의 역사적 발전 과정을 이해해야 한다.


제1세대 자본 개념은 물적 자본(物的 資本·physical capital)으로 시작되었다.


인간에게 궁극적으로 필요한 물자는 소비재지만 소비재 생산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인간은 산업용 기계,대규모 공장 설비 같은 생산재를 발전시켜 산업혁명을 탄생시켰다.


이런 생산재를 경제학자들은 물적 자본이라 부른다.


그러다가 경제학자들은 새로운 현상을 발견하게 되었다.


좋은 교육과 훈련을 받은 근로자는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 더 높은 생산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좋은 교육과 성실한 자세 등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인간적 자질을 경제학자들은 인적 자본(人的 資本·human capital)이라 부르게 되었고,이 이론을 정립한 학자들은 1979년 노벨 경제학상까지 받았다.


우리나라의 경우 인적 자본이 경제성장에 어떻게 기여했는지 살펴보자.1960년대 우리나라 기업 현실,예컨대 봉제회사의 경우를 보면 그들이 보유한 물적 자본은 재봉틀 몇 대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당시 우리 기업들은 낮은 임금에도 불구하고 성실히,그리고 좋은 솜씨로 열심히 일하는 수준 높은 근로자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들이 정성껏 만든 제품은 가격 경쟁력을 바탕으로 세계 시장에서 인기리에 팔려나갔고,이런 현상이 경공업 분야 전반으로 확산되면서 수출입국,중화학 공업화를 실현시켰다.


이렇게 성장한 한국 경제를 세계 경제학자들은 인적 자본에 의한 성공 모델로 평가했다.


우리나라 인적 자본의 우수성은 지금도 권위있는 국제기구들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국제학생실력평가기구(PISA)는 지난 5년간 OECD 41개국의 중·고생(한국 학생 1만2000명 포함 88만명)의 학력을 평가해 본 결과 한국 학생들이 문제 해결(problem solving) 능력에서 세계 1위,수학과 과학 실력에서 세계 3~4위 수준에 있다고 보고했다.


2005년 5월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은 한국의 기술개발 능력이 세계 2위에 이르렀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우수한 자질을 가진 국민이 왜 1인당 국민소득 세계 49위(세계은행 발표 '세계개발지수 2005'),즉 2류 국가 수준에 머물러 있나?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이론이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다.


그러면 사회적 자본이란 무엇인가?


정보화 시대,세계무역기구(WTO) 체제에 의한 무한경쟁 시대가 오면서 인간과 인간 사이,인간과 조직 사이,조직과 조직 사이 등 '사이'의 품질 여하가 과거 어느 때보다 중요한 경쟁력의 원천이 되기 시작했다.


자동차 조립업체와 여기에 부품을 납품하는 하도급업체 '사이'를 예로 들어보자.이들 사이가 상호 신뢰 속에 기술 및 원가 데이터를 공유하면서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공동 연구를 하는 '사이'냐,아니면 서로 데이터를 숨기면서 강자가 약자를 힘으로 억누르는 '사이'냐에 따라 이들이 만들어내는 제품의 경쟁력은 큰 차이가 난다.


그래서 고스만(John Gossman) 같은 사람은 21세기 자동차 시장은 완성차 회사 대 완성차 회사(예컨대 도요타 대 현대자동차)의 경쟁이 아니라 도요타의 공급 사슬(supply-chain) 대 현대차의 공급 사슬 간 경쟁이라고까지 말한다.


제2세대 자본 개념인 인적 자본이 개인 각자가 보유한 지식 기술 성실성 등 개인적 자질에 의한 경쟁력이라면 제3세대 자본 개념인 사회적 자본은 개인과 개인 사이,개인과 조직 사이,조직과 조직 사이 등 '사이'의 상태가 만들어내는 경쟁력을 의미한다.


여기서 '사이'의 신비로움에 관한 철학 차원의 고찰을 위해 물리학에서 밝혀낸 결합 에너지(binding energy)라는 신비로운 힘에 관해 알아보자.자연 속에서 가장 공고한 결합체는 원자핵이고,원자핵은 양성자(protons)와 중성자(neutrons)라는 두 종류의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두 종류 입자를 합쳐서 물리학에서는 핵자(nucleons)라고 부른다.


양성자들은 같은 종류의 플러스 전기를 가지고 있으므로 서로 반발하여 흩어져야 하고,중성자들은 전기적으로 중성이므로 결합력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도 이들이 강력한 결합 에너지를 가지고 뭉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불가사의를 풀기 위해 물리학자인 유가와 교수는 핵자들 사이를 매개하는 '무엇'이 존재하며,핵자들이 이 '무엇'을 주고받으면서 서로 강하게 결합한다는 가설을 발표했다.


이 가설이 실험을 통해 증명되면서 유가와 교수는 1949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고,물리학자들은 이 '무엇'을 중간자(meson)라고 부르게 되었다.


인간 사회에서도 개체들 사이에 의미있는 '무엇'을 주고받을 수 있어야 결합 에너지가 생성될 것 아닌가?


2000년 브라질 쿠리티바에서 열린 세계 경영경제학회에서 학자들은 열띤 논의 끝에 인간을 결합시킬 수 있는 의미있는 매개체는 신뢰성(trust) 진실성(integrity) 단결성(solidarity) 개방성(openness) 등이며 이 네 가지를 사회적 자본의 기본 요소로 꼽았다.


특히 이들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게 신뢰성과 진실성이다.


신뢰성이란 약속(promise)을 지킬 수 있는 의지 및 능력을 뜻한다.


그러면 신뢰성,즉 사회적 자본의 축적이 위력을 발휘한 역사적 사례를 살펴보자.중국 춘추전국시대 제(齊)나라가 노(魯)나라와 싸워 이긴 후 노의 땅 수(遂)를 할양받는 강화의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이때 노의 조말(曺沫)이 단 위로 뛰어올라가 제나라 환공 목에 비수를 들이대며 "수를 빼앗기면 노는 굶어 죽는다.


수를 빼앗지 않겠다고 공약하라"고 요구했다.


환공은 위기를 면하기 위해 조말의 요구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동의를 받아낸 조말은 단에서 내려왔다.


환공은 조말을 잡아들이고 협박에 의한 약속은 무효임을 선언하려고 했다.


그러나 참모 관중(管仲)은 "비록 협박에 의한 약속이라도 그것을 지키면 제후들의 신뢰를 얻게 되고,신뢰를 얻으면 천하를 얻게 됩니다"라고 조언했고,관중의 조언에 따라 환공은 폐기할 수도 있는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그 후 2년이 지나면서 남쪽에서 초나라가 북진해 올라왔고,이에 대항하기 위해 북의 제후들은 견(甄)에서 회동했다.


여기서 제후들은 억울하게 당한 약속도 지켜주는 환공을 신뢰하여 그를 중심으로 뭉쳤고,이로써 환공은 춘추시대 5대 실력자(春秋五覇)의 첫 인물이 되었다.


사회적 자본의 제1요소,신뢰의 축적으로 환공은 그의 정치적 목표를 쉽게 달성한 것이다.


사회적 자본의 제2요소인 진실성은 원칙(principle)을 준수하는 의지 및 능력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보자.1979년까지 한국 식품회사들은 미국에서 우지(牛脂)를 수입하여 라면 등 식품을 만들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지가 미국에서는 공업용으로 분류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우지를 정제하여 사용하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는 것이 당시의 상식이었다.


그러나 어느 한 회사는 식품 제조의 원칙상 공업용으로 분류된 원료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며 t당 84달러의 원가 부담을 감수하고 식물성 기름으로 교체했다.


세월이 흘러 1989년,공업용 우지를 식품 제조에 사용한다는 비난이 언론을 통해 폭발하면서 소위 '우지파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미 10년 전 우지를 포기한 이 회사는 우지파동에서 무사했을 뿐만 아니라,소비자로부터 '믿을 수 있는 회사'라는 사회적 자본(integrity)을 축적,지금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회사의 하나로 성장했다.


1997년 한국에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위기가 터졌을 때,선진국 경제 평론가들은 한국의 금융위기가 공인회계사들의 진실성 결여에서 기인했다고 비판했다.


세계적 대기업 엔론의 파멸도 이 회사의 사회적 자본 붕괴에 의한 결과다.


이처럼 개인 기업 사회조직 등 모든 차원에서 사회적 자본의 중요성에 대한 몰지각(沒知覺)은 경쟁력 상실로 이어지는 시대가 온 것이다.


"나에게 긴 지렛대(lever)와 지렛목을 놓을 자리만 준다면 지구라도 움직일 것이다." 이는 아르키메데스가 지렛대 원리를 발견하고서 한 말이다.


인간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도구를 발명했고,도구는 인간 삶에 필수 불가결한 것이 되었다.


도구의 본질은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처럼 그것 없이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거나 생산성을 높여줄 수 있는 효능이다.


무한경쟁 시대가 되면서 도구의 개념도 확대되었고,21세기는 사회적 자본이 필수 불가결한 경쟁 도구,즉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 역할을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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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력 ]


△1940년 충남 공주생


△1963년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1969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경영학 석사


△1971년 펜실베이니아대 경영학 박사


△1973년 서울대 상과대 조교수


△1985년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


△2005년 서울대 명예교수


△2005년 한양대 석좌교수


◆주요 저서


△계량적 세계관과 사고체계


△과학과 기술의 경영학


△경영 경제 인생강좌 45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