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태정 LG경제硏 연구위원 > 우리나라의 노동시장 유연성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세계은행(World Bank), OECD, 국제경영개발원(IMD) 등 주요 국제기관들과 국내 경영계는 해고 및 고용조건의 유연성,고용보호 수준 등에서 우리나라 노동시장이 여전히 경직적인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반면 노동계는 과거에 비해 기업의 고용조정이 용이해지고 비정규직 근로자도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점 등을 들어 노동시장이 외환위기 이후 상당히 유연해졌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노동시장의 유연성에 대한 평가가 크게 엇갈리는 이유는 유연성을 측정하는 방법이 다양해지고 그에 따라 해석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동안 노동시장의 유연성은 주로 '고용조정이 얼마나 용이해졌는가'에 초점이 맞춰졌다. 하지만 경기변동에 대해 고용변수들이 얼마나 탄력적으로 반응하는가를 의미하는 '고용의 유연성'은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단기적인 측면에서만 평가하는 것이다. 장기적인 측면에서 유연성 개선 여부는 '실업의 지속성'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이는 실업의 변화를 처음 야기시켰던 충격이 없어진 이후 그 영향이 얼마나 장기간 지속되는가를 말한다. 실업자가 되더라도 실업에서 빨리 벗어난다면 실업의 지속성이 낮고,실업상태가 길어지면 높다고 보는 것이다. 이 방식에 따라 실업의 지속성이 높을수록 노동시장이 경직적이라고 평가한다. '고용의 유연성'과 '실업의 지속성'을 중심으로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유연성 개선 여부를 경제모형으로 분석해보면,'고용의 유연성'은 제고된 반면 '실업의 지속성'은 외환위기 이전보다도 오히려 악화된 것으로 나타난다. 외환위기 이후 고용조정 측면에서 유연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기업들의 고용행태가 고용조정이 보다 용이한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특징 중 하나는 임시직 일용직 등 비정규직 근로자와 주당 36시간 미만의 단시간 근로자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체 취업자 가운데 비정규직과 단시간 근로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외환위기 이전 각각 20%대 중반과 6%대에 불과했으나 2004년에는 32.2%와 11.4%까지 상승했다. 제도적 측면에서는 고용조정제와 근로자파견제,탄력적 근로시간제 등이 도입됐다. 기업들도 성과급 및 연봉제 도입 확대,인력 재배치 등 고용과 임금, 기능 면에서 유연성을 제고하려는 노력을 강화해온 결과로 보인다. 반면 실업의 지속성이 개선되지 않는 것은 장기 실업자 비중이 외환위기 이후 낮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과거에 취업한 경험이 있었던 전직 실업자 중에서 1년 이상 장기간 실업상태에 있는 실업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 1998년 11.6%에서 2004년에는 17.4%까지 높아졌다. 이 같은 결과는 향후 정부의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즉 성장잠재력 확충을 통한 일자리 창출과 직업훈련,취업알선,규제완화 등 실업의 지속성 개선을 위한 노력이 좀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거시경제 측면에서도 실업의 지속성 개선은 매우 시급하다. 고용조정이 유연화되더라도 실업의 지속성이 개선돼 실업에서 쉽게 탈출할 수 있다면 별 문제가 안될 수 있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고용의 유연성이 제고되면서 비정규직 양산,고용불안과 함께 한번 실업에 빠지면 재취업하기가 점차 어려워지는 등의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소득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빈곤층이 늘어나는 요인으로 작용해 최근 내수회복을 가로막는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 결국 고용의 유연성 제고뿐 아니라 실업의 지속성도 개선돼야 진정한 의미에서 노동시장이 유연화됐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