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그룹 해체를 둘러싼 논쟁 중 하나가 외환위기와 대우 패망 간의 상관관계다. 당시 대우 해체를 주도한 정부와 금융당국은 차입에 의존한 대우의 세계경영이 결국 외환위기를 불러온 요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에 반해 대우인들은 외환위기가 터지지 않았으면 대우 세계경영은 순항했을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논의의 핵심은 당시 대우그룹 부채규모의 적정성여부로 압축될 수 있다. 대우그룹은 외환위기가 터지기 전인 1995년부터 '세계 경영'의 기치를 앞세워 공격적으로 해외사업을 추진해왔다. 해외 사업의 축은 초기 자금 수요가 큰 자동차였다. 대우그룹은 1997년 말까지 중국 인도 외에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 우즈베키스탄 등에 총 14개의 해외 합작공장을 건설하거나 인수했다. 그러나 해외 공장의 가동률은 50%를 넘지 못했다. 사업 확장에 필요한 자금은 물론 운전자금까지 국내외 차입에 의존했다.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대우 본사에서 지급보증을 서면 해외법인은 얼마든지 달러 자금을 빌려 쓸 수 있었다. 당시 대우 계열사 중 대규모 이익을 내는 곳이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해외 사업은 사실상 차입에 의존했던 게 사실이었다. 김 회장은 차입에 의존해도 사업이 정상화되면 상장을 통해 자금을 회수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런데 김 회장도 예상할 수 없었던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국가 신용이 곤두박질쳤다. 축소 경영이 화두로 떠오른 상황에서도 확대경영만을 고집해 온 때문에 김 회장은 적절한 위기 극복 프로그램을 갖고 있지 못했다. 궁지에 몰린 김 회장은 1999년 들어 뒤늦게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느끼지만 중후장대 산업을 영위하는 그룹의 특성상 자산 매각으로 자금을 확보하는 데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는다. 국내외 금융사들이 대우로부터 자금 회수에 나선 시점은 1998년 10월 노무라증권 서울지점이 '대우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보고서를 배포하면서부터다. 그렇지 않아도 시장의 신뢰를 잃어가던 대우에 대한 금융권의 자금회수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대우는 해외 법인의 외화차입금을 대신 갚아주는 과정에서 98년 상반기에만 빚이 4조3000억원가량 늘어났다. 1997년 3조원이던 대우그룹 금융비용이 1998년에는 6조원으로 늘었다. 그나마 1998년 7월과 10월 정부가 기업어음(CP)과 회사채 보유한도를 규제하면서 대우는 정상적인 자금조달 길이 막혔다. 그룹 존폐 위기를 맞은 김 회장은 회생을 꾀하기 위해 김대중 대통령에게 서너 차례 편지를 넣고 대우자동차를 GM에 매각,50억달러를 조달하려고 했으나 아무것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윽고 1999년 7월 김 회장은 계열사의 보유 주식 및 부동산 10조원을 채권단에 담보로 내놓기로 하면서 채권단으로부터 신규 자금 4조원을 지원받고 초단기 CP의 만기를 6개월 동안 연장받게 된다. 김 회장은 모든 것을 다 내놓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한번 깨진 시장의 믿음을 되사긴 어려웠다. 그로부터 한달 뒤인 8월26일 대우자동차 ㈜대우 등 12개 계열사가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갔고,결국 대우그룹은 해체되고 말았다. 김 회장은 차입 경영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해 세계경영의 꿈을 접어야 했고 앞만 보고 뛰었던 대우 계열사 사장들은 줄줄이 법정에 서야 했다. 이익원 기자 i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