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항상 이런 말을 한다. 물적 담보 말고 자신이 가진 기술의 가치를 토대로 금융을 조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이것은 일찍이 미국의 경제학자 슘페터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던 혁신 환경이다. 그는 기술을 평가해 자금을 대출해주는 은행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의 금융 환경은 크게 달라졌다. 벤처캐피털 등 여러가지 펀드들이 그런 역할을 맡고 있다. 또 그것이 사회적 적정수요에 못 미친다고 생각되면 정부가 나서서 금융시장의 사각지대를 메워주는 노력을 하기도 한다. 이런 모든 역할과 노력을 '기술금융(혹은 모험금융 혁신금융)'이라고 일컫는다. 기술금융은 활성화된 나라도 많지만 그렇지 못한 나라도 있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기술금융의 활성화 방안을 놓고 많은 논의가 있어왔다. 최근 기술신용보증기금은 공학 박사들과 평가 전문 인력 등으로 구성된 '중앙기술평가원'을 출범시켰다. 앞으로 국내외 선진기술의 사업성과 기술 가치를 평가해 '기준 가격'을 제시할 계획이라고 한다. 기준 가격이 제시되면 기술금융 활성화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기대에서 나온 정부의 벤처활성화 대책 중 하나다. 문제는 기준 가격이라는 것이 과연 시장에서 통용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가치 없다고 생각했던 기술이 큰 혁신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혁신적이라던 기술이 하루아침에 사장(死藏)되기도 하는 세상이고 보면 쉽지 않은 일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시장이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어떤 것도 소용없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기술 평가가 제대로 안돼 기술 사업화나 기술 거래, 기술 기업의 인수·합병 등이 위축된 것인지 아니면 거꾸로 이것들이 각종 규제나 기타 요인으로 인해 위축돼 있다 보니 기술 평가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것인지 그 인과관계는 정말 잘 따져 볼 일이다. 정부는 예나 지금이나 기술 평가가 먼저라는 인식에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정부 정책이 아직껏 기술을 평가할 사람, 평가할 기관 등에 중점을 두는 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이 이를 말해준다. 만약 정부가 이런 인식에서 벗어나 기술 사업화나 기술 거래, 기술 기업의 인수·합병이 위축됐기 때문에 기술 평가도 제대로 발전할 수 없었다고 판단했다면 정책 역시 크게 달라졌을 게 분명하다. 시장에서 그런 수요가 먼저 일어날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하고 이를 지원할 펀드를 활성화하는 등 자금 시장 쪽에 초점을 맞춘 정책을 내놨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예컨대 펀드 활성화 등으로 인수·합병이 촉발되면 당연히 기업 가치를 따지지 않을 수 없다. 유형 자산은 물론이고 기술 등 무형 자산도 그 대상이다. 처음에는 어림잡는 것으로 협상이 이뤄지겠지만 계속되다 보면 체계적인 평가와 협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고 기술평가 수요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기술 평가를 필요로 하는 쪽은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외부에 평가를 의뢰할 것이고,책임 또한 스스로 질 것이다. 물론 평가자나 평가기관은 신뢰성에 따라 시장에서 달리 대우받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다. 시장은 그런 식으로 발전한다. 기술 평가와 기술금융 문제에 대해 정부는 인식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 선형적 공급적 발상을 버리고 시장과 수요를 먼저 생각해 보면 길이 보일 수도 있기에 하는 얘기다. 안현실 논설위원ㆍ경영과학博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