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세를 일기로 23일 타계한 P.V. 나라시마라오 전 인도 총리는 무엇보다도 인도의 경제개방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인물이다. 그는 또 총리로 재직했던 지난 1991년부터 1996년까지 네루-간디 가문에 소속되지 않은 `아웃사이더'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국민회의당 수장에 올라 과반의석을 확보하지 못한 소수정권의 임기를 끝까지 채워냈던 탁월한 정치적 수완가였다. 뛰어난 책략과 비범할 정도의 인내력을 보유한 그는 야인으로 생활하던 중 라지브 간디 전 총리가 암살되자 `구원투수'로 나와 사분오열된 당을 정비했으며 맘모한싱 현 총리를 재무장관으로 영입, 인도를 외환위기에서 구해냈다. 그가 인도 경제에 남긴 족적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으며 이 부분에서 그는 싱현 총리와 함께 여전히 인도 경제개방의 선구자와 설계자로 명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가 총리로 있었던 5년간 인도 정치는 `격동의 세월' 그 자체였다. 총리취임 이듬해인 지난 1992년 12월에는 인도의 대표적인 힌두교 성지인 아요디야에서 과격 힌두교도들이 바브리 이슬람사원을 파괴하면서 두 종교간의 피비린내나는 살육전으로 확대돼 2천여명이 사망하는 최악의 참극이 빚어졌다. 또 1996년 잠무 카슈미르주에서는 7년만에 이뤄지는 선거를 앞두고 분리주의 단체의 무장테러가 부쩍 늘어나면서 역시 엄청난 희생자를 냈다. 특히 그의 총리 재임기에는 다수의 국민회의당 지도자들이 갖가지 부정부패 혐의에 연루됐고 본인 역시 이 부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난관을 특유의 `지연전술'로 극복하면서 권좌를 지켰으나결국 1996년 국민회의당이 선거에서 참패하면서 국민의 심판을 받게 된다. 그는 총리직에서 물러나자 마자 전현직 인도 총리로는 처음으로 유권자 매수와공문서 위조, 사기 등의 혐의로 기소되는 치욕을 맛봤으며 나중에 무혐의 처분을 받기는 했지만 결국 이 일로 국민회의당에서 지도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정치무대에서 퇴장한 뒤 칩거생활에 들어간 그는 자전적 소설인 `내부인(The Insider)'을 발표, 정치권 안팎의 주목을 끌기도 했다. 남인도 안드라 프라데시주에서 평범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영어는 물론불어와 스페인어 등 6-7개 국어에 능통했으며 총리에 앞서 인도 외무장관과 국방장관도 지냈다. 그는 그랜드 슬램 경기의 모든 녹화 테이프를 소장했을 정도로 열렬한테니스 광이기도 했다. (뉴델리=연합뉴스) 정규득 특파원 wolf85@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