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값이 수개월째 고공 행진을 계속하면서 제조업계 전반에 가격 인상을 둘러싼 갈등이 연쇄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유가 급등을 제품 값에 반영하려는 정유ㆍ유화업체에서 '더 올리면 우린 죽는다'고 외치는 화섬ㆍ의류ㆍ식품ㆍ중소가공업체에 이르기까지 '올린다' '못올린다'를 놓고 끝없는 설전을 벌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상당수 업체들은 벌써 수개월째 공장을 돌릴수록 적자를 내는 최악의 상황에 내몰려 있다. ◆ 가격 인상 놓고 줄줄이 충돌 효성 코오롱 등 화섬업체들은 13일 석유화학업체들이 원료가격 추가 인상을 요구하자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동안 급등한 원자재 가격 때문에 최악의 적자에 조업 중단 사태까지 벌어졌는데 또 인상할 경우에는 더 이상 버텨낼 자신이 없어서다. 나일론 원료인 카프로락탐의 경우 지난해 말 t당 1천3백달러에서 올들어 1천3백50달러로 급등한 상태다. 최근 유화업체들은 "1백달러를 더 올리겠다"고 통보했다. 폴리에스터 원료인 고순도 테레프탈산(TPA)이나 에틸렌글리콜(EG)의 값도 작년 말보다 10%가량 올랐는데 앞으로 얼마나 더 오를지 알 수 없다. 이 원료를 쓰는 화섬업체들은 "기름값이 뛰는 상황은 이해하지만 지난해 큰 폭의 흑자를 낸 유화업계가 조금 양보해도 되지 않느냐"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반면 유화업계는 "원자재 가격을 우리가 맘대로 좌지우지할 수 없다"며 맞서고 있다. 가격 인상의 불똥은 연쇄적으로 튀고 있다. 화섬업체들이 원가 상승분을 더 이상 버텨내지 못하고 제품가에 반영시키자 수요처인 직물업체들은 더 죽을 맛이다. 한 직물업체 관계자는 "원사 가격이 더 올라갈 경우 공장문을 닫아야 할 지경"이라고 하소연했다. 유화업체로부터 저밀도 폴리에틸렌(LDPE)이나 염화비닐(PVC) 등을 공급받는 중소 가공업체들도 볼멘소리 일색이다. 한 플라스틱 가공업체는 "(유화업체들이) 올들어 t당 30만원씩이나 올려 놓고 또 다시 국제가격 운운하며 가격 올릴 궁리만 한다"며 "수요처인 자동차나 가전업계가 내수 불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어 가격 전가도 할 수 없다"고 울상을 지었다. ◆ 출혈경쟁으로 적자생산 우려 코오롱이나 효성 등 덩치가 큰 업체들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폴리에스터 원사만 생산하는 중소 화섬업체나 영세한 화학 소재 가공업체들은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오른 원료 가격을 고스란히 떠안고 있다. 가격 인상을 요구했다가는 그나마 있는 거래처도 끊어질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식품포장용 비닐을 생산하는 H사는 5개월째 적자 상태다. 원료인 LDPE, HDPE(고밀도 폴리에틸렌) 가격이 올들어 t당 30만원이나 올랐지만 제품 가격에는 10만원밖에 반영시키지 못한 탓이다. 유가가 오르면서 물류비와 부자재 가격 등도 덩달아 올라 적자폭은 눈덩이처럼 커져만 가고 있다. 이 회사 P사장은 "1t을 생산해 2만∼3만원 정도 남기는데 가만히 앉아서 20만원을 손해보게 생겼으니 적자가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거래처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적자생산을 계속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김병일ㆍ송태형ㆍ유창재 기자 k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