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취임하면서 헌법 제69조에 따라 "헌법을 준수하고…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선서했다. 이 선서에는 5년 임기 동안 국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윤리적 약속이 포함돼 있다. 지난 10일 노 대통령이 "그동안 축적된 국민 불신에 대해 국민에게 재신임을 묻겠다"고 선언한 것은 이러한 도의적 의무를 외면하고 대통령직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무책임한 행동으로 밖에 볼 수 없다. 노 대통령이 말하는'재신임'에는 두 가지 함의가 있다고 본다. 첫째는 부결되면 사임하겠다는 다짐이다. 대통령의 헌법준수 선서가 반드시 임기를 마쳐야 할 법적 의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대통령은 누구의 허가도 받지 않고 사임할 자유가 있다. 대통령이 자기의 직무수행을 진지하게 반성해 사임하고자 한다면 그냥 물러나면 된다. 사임 여부를 결심하기 위해 국민의 의사를 확인하고 싶다면 비밀리에 여론을 조사할 일이다. 재신임의 두 번째 함의는 가결되는 경우 그 동안의 실정을 '정치적으로' 사면받고,새로운 지도력을 얻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대통령이 국정을 쇄신함으로써 국민의 지지를 회복하는 데서 정치적 부활을 모색하지 않고,국민투표를 통해 일거에 국민의 지지를 재확인하고 싶어 하는 데 있다. 국민투표제도는 대의제민주주의의 약점을 직접민주주의의 요소로 보완키 위해 채택된 것이라고 흔히 설명된다. 대의기구에 의한 공동체의 의사결정을 대체할 시스템은 아직 없다. 합리적인 의사결정은 대다수 참여자들이 주어진 사안을 정확하게 이해하면서 충분히 토론하는 것을 요구하고,거기에는 축적된 지식과 경험 그리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지도력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국민투표에 부치기 적합한 안건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특히 국민발안이 허용되지 않고,대통령만이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는 체제는 직접민주주의의 순기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국회의 입법권과 행정부 통제권을 무력화시킴으로써 권력분립에 의한 균형을 파괴하는 역기능만 초래할 위험마저 지닌다. 우리 헌법 제72조는"대통령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외교·국방·통일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을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다"고 정하고 있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대통령 임기 중에 재신임을 묻는 것을 염두에 두고 국민투표제도를 마련한 것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헌법규범은 해석과 관행을 향해 열려 있다. 대통령의 재신임이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인지 여부는 재신임을 얻지 않으면 "대통령 못해 먹을" 정도로 현재 상황이 위태로운 지경인가 하는 사실판단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 판단의 제1차적 권한과 책임은 대통령에 주어져 있다. 필자의 견해를 묻는다면,10월 10일 이전에 대통령의 재신임은 결코 국가안위에 관한 문제가 아니었으나,노 대통령이 재신임을 거론하는 순간 그렇게 변해버렸다. 대외적으로 국가를 대표하며 최고법집행자이자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산적한 현안은 내팽개치고 권력의 정통성 확보에만 골몰하는 바람에 사실상 정부부재인 상태가 장기화할 우려가 있다면 국가안위에 관한 문제라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 와서 재신임을 정책과 연계하는 것도 옳지 않다. 선거제도 개혁과 같은 사안은 국회에서 정교하게 다듬어야지 국민투표로 결정할 일이 아니다. 분명히 해둘 것은 노 대통령이 재신임을 얻어 정치적 승리를 거두더라도 법적으로 변하는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대통령 임기가 새로 시작되는 것도 아니요,국회 내의 정당구도가 바뀌는 것도 아니요,대통령 측근의 범죄행위가 면책되는 것도 아니다.국민투표가 강행된다면 우리는 투표장 입구에서 자문하게 될 것이다. 숱한 소모적 논쟁을 거치고,막대한 예산을 지출해가며 대통령이 본래의 임기를 마칠 수 있도록 재신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대안은 있다. 지금이라도 노 대통령이 재신임 선언을 철회하고 야당과 협력해 국정을 쇄신하면 된다. 그럴 의지와 자신감이 없다면 조용히 물러나는 것이 혼란을 조기에 수습하고 국민의 세금을 아끼는 길이다. -------------------------------------------------------------- ◇ 이 글의 내용은 한경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