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부 예산 1천197억원을 빼돌려 총선과 지방선거에 불법지원한 사건인 이른바 '안풍' 사건에 대해 법원이 공소사실을 상당부분 유죄로 인정하며 실형과 함께 총 856억원의 추징금을 선고함으로써 이 사건은 2년8개월만에 1심이 종결됐다. 이로써 `방탄 국회'와 재판 고의지연, 법관 기피신청, 변호인 집단불출석 등으로 얼룩졌던 이 사건에 대한 엄정한 사법적 심판은 물론, 집권당 사무총장 출신의 강삼재(姜三載) 의원 역시 `정치생명'에 큰 타격을 입게 됐다. 이 판결은 국가가 두 피고인과 한나라당을 상대로 낸 940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여 피고인들은 이중의 부담을 떠안게 됐다. ◆재판경과 = 검찰이 2001년 1월 경부고속철 차량선정 로비의혹 수사중 강 의원 차명계좌에 정체불명의 뭉칫돈이 입금된 사실을 확인하고 김기섭(金己燮) 전 안기부 운영차장을 구속함으로써 시작된 이 사건은 '정치보복과 표적수사'라는 한나라당의 반발 속에 험로가 예고됐다. 수사과정에서 신한국당이 선거자금을 이미 마련했지만 자금세탁 등을 위해 안기부 계좌를 이용해 지원한 것이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검찰은 안기부 돈을 받은 정치인 180명의 명단과 금액을 전격 공개하고 권영해 전 안기부장과 이원종 전 청와대 정무수석 등을 소환하는 등 압박수사에 나섰으나 한나라당의 '방탄국회'로 강의원 소환이 불발로 끝나자 강 의원을 단 한 차례도 소환조사하지 못한 채 불구속 기소해 사건을 법원에 넘겼다. 법원의 1심 재판 역시 재판부가 세 차례 바뀌는 동안 잇단 파행으로 얼룩졌다. 당초 서울지법 형사합의21부(장해창 부장판사)에 배당됐던 이 사건은 전직 국정원장들에 대한 증인신문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피고인측이 재판부의 결심을 거부해 지연됐고, 새 재판부(박용규 부장판사)를 상대로는 법관 기피신청을 냈다가 지난해 대법원에서 최종 기각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강 의원 변호인들은 변호사 연수회 참가를 이유로 공판에 불출석하기도 했고, 현 재판부에 "국정원 직원법이 국정원 직원의 법정 진술을 차단하고 있다"며 위헌법률 심판제청신청도 내며 `직원 보호'에 안간힘을 썼다. ◆공소사실 대부분 유죄 = 법원은 두 피고인이 공모해 940억원을 횡령한 혐의중 총선지원금 731억원을, 김 전 차장이 민자당에 257억원을 불법지원한 혐의중 125억원을 인정, 사실상 공소사실 대부분을 인정했다. 안기부가 발행한 자기앞 수표가 여러 계좌에서 입출금을 반복하면서 일부 자금 흐름이 끊기는 부분도 있었으나 대체로 그 동일성이 인정됐다. 이와 함께 공모사실을 부인하는 두 피고인의 항변에 대해 ▲안기부 예산은 안기부장 관여없이 김 전 차장 전결로 집행됐고 ▲강 의원은 당시 집권당 사무총장으로 선거자금을 관리하는 선대위원장이었으며 ▲둘 사이에 수차례 전화통화가 있었던 점등 구체적 자금전달 경로는 없으나 적어도 암묵적 의사전달이 있었다고 판단했다. 또 6.27 지방선거에서 민자당이 참패한 이후 신한국당의 선거전망이 비관적인데다 신한국당이 당사매각 위기를 겪으면서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선거자금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정치적 정황도 고려됐다. 하지만 안기부 연간예산의 22%에 달하는 1천197억원을 모두 횡령했다고 보기에는 당시 업무차질이 전혀 없었고, 과거 안기부 계좌를 통한 자금세탁 관행 등은 검찰 공소사실을 모두 인정하지 않은 판단의 근거가 됐다. ◆"국민혈세 횡령 엄중처벌" = 재판부는 양형이유에서 "국가정보기관인 안기부업무 특성상 세밀한 감사가 어렵다는 점을 이용해 국가예산을 특정정당 자금으로 사용한 죄가 무겁다"며 중형 선고이유를 밝혔다. 김 전 차장에 대해서는 "공무원의 지위를 망각하고 안기부 존재의의를 의심케하고 정보기관의 신뢰를 떨어뜨렸다"고 밝혔으며, 강 의원에 대해서는 "정당이익에 우선하는 국가이익을 무시하고 소속당 승리를 위해 국민혈세를 횡령한 죄질이 심히 나쁘다"고 지적했다. 특히 강 의원에 대해서는 "과거의 정치관행인 음성자금 방지를 위해 사건의 실체를 털어놓는 것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인데도 그와 동떨어진 태도로 끝까지 과거 정치관행에 책임을 전가하는 등 개전의 정을 찾기 어렵다"고 강도높게 비판했다. 재판부는 김 전 차장이 당시 집권당측의 요구를 거부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을, 강 의원은 정치환경상 혼자 죄책을 지는 것이 가혹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유리한 정상보다 불리한 정상이 훨씬 많다"고 다시 못박았다. 그러나 김 전 차장에 대해서는 안기부 예산으로 개인적 이득을 취하지 않은 점을 감안, 731억원에 대한 추징이 면제됐고 강 의원은 국회 회기중임을 감안, 법정구속은 면해줬다. (서울=연합뉴스) 김상희 기자 lilygardener@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