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송금 및 현대 비자금 150억원 사건규명의 핵심 열쇠를 쥐고 있는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이 4일 오전 서울 계동 사옥에서 투신자살했다. 이에 따라 이들 사건 진상규명 및 관련자 처벌을 위한 검찰 수사와 재판이 난항을 빚고,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 조성 등 대북 경제협력 사업의 차질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 시신 발견 및 현장= 4일 오전 5시 50분께 서울 종로구 계동 140의 2 현대본사 사옥 뒤편 주차장 앞 화단에서 정 회장(55)이 쓰러져 숨져 있는 것을 사옥 청소원 윤모(63) 씨가 발견, 경찰에 신고했다. 윤 씨는 "새벽에 청사주변을 청소하던 중 화단 안에 한 노인이 1.5m 길이의 소나무 가지에 발목과 상체 부분이 가려진 채 똑바른 자세로 누워있어 술취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 줄 알고 주차관리원을 통해 경찰에 신고했다"고 말했다. 정 회장은 12층에서 떨어졌으나 화단 소나무 가지 등에 걸린 탓인지 사체 훼손은 심하지 않았다. 반듯한 자세로 쓰러진 채 발견된 정 회장은 밤색 하의와 검정색 T셔츠 차림이었고, 평소 착용하던 안경은 없었으며, 화단 소나무 가지로 가려진 몸에는 큰 상처가 눈에 띄지 않았다고 경찰이 전했다. ▲ 경찰 및 검찰 수사=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화단에 쓰러진 사람이 이미 숨져 있었고, 그의 신원이 정 회장이라는 사실을 신속히 확인했다. 비서실 소속의 한 여직원이 "숨진 분은 현대 아산 회장님인데 오늘 새벽까지 사무실에 같이 있었다"며 시신의 신원을 확인해주고, 황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고 경찰이 전했다. 경찰은 정 회장이 3일 밤 늦게 사옥 12층에 위치한 회장실로 들어갔고, 사무실 창문이 열려있었으며, 소방관의 사체확인 소견 등으로 미뤄 이날 오전 1-2시께 추락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날 오전 6시께 현장에 출동한 119구급대원 소방교 이모 씨는 사체의 경직 정도 등으로 미뤄 정 회장의 사망시점은 4-5시간 전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현대그룹 사옥의 한 보안요원은 "어제 밤 11시52분께 회장님이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사무실로 들어간 이후 나머지 출입자는 없었다. 회장님이 사무실에 들어갈때 30분 후에 다시 내려온다고 해서 보안직원들이 기다렸다"고 말했다. 서울지검은 정 회장의 투신자살 소식을 접한 직후 당직검사를 서울 종로 계동 사옥으로 급파해 사체검안 등 현장을 지휘토록 했다. 검찰은 사안의 중대성에 비춰 정 회장 변사 현장을 신속하고 엄정히 수습, 처리하는 게 필요하다고 보고 당직인 서울지검 유현식 소년부 검사를 현장으로 보내 사망 경위 등을 정밀 조사키로 했다. 검찰은 정 회장 사인에 대한 의문점이 제기될 경우 정 회장 시신에 대한 부검여부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 유서내용 및 자살배경= 정 회장의 투신자살 배경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경영난과 대북송금 및 현대비자금 조성 수사에 대한 심리적 압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현장 주변에서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경찰은 정 회장이 사무실에 남긴 유서내용이 공개될 경우 정확한 자살배경을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나중에 공개된 유서내용에는 극단적인 행동을 선택한 원인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김윤규 현대아산사장과 부인, 자녀 3명에게 각각 남긴 A4용지 4장짜리 분량의 자필유서에는 고(故) 정주영 회장의 자식으로서 부끄러웠다며 자신의 과거행동을 후회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유서에는 또 "나의 유분을 금강산에 뿌려달라. 명예회장님께서 원했던 대로 모든 대북사업을 강력히 추진하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이 쓰여져 있었다. 따라서 정 회장은 금강산관광 및 개성공단조성 등의 대북사업을 추진하면서 선친인 정주영 회장의 유지를 받들어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데 대한 심한 자책감이 투신자살의 한 원인이 됐을 것으로 경찰 관계자는 추정했다. 그러나 당분간 정확한 자살원인의 규명이 쉽지 않을 것으로 보여 자살배경을 둘러싸고 정계와 재계 등을 중심으로 각종 억측이 난무할 것으로 전망된다. 정 회장은 최근 `대북불법송금'과 관련해 특검수사를 받은 데 이어 150억원 규모의 비자금 조성 의혹과 관련해 출국금지 상태에서 다음 주 중으로 대검에 소환될 예정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대검 중수부는 현대비자금 150억원 조성 의혹과 관련해 정 회장을 지난 달 26일과 31일, 이달 2일 등 최근 3차례에 걸쳐 출퇴근 형식으로 소환해 조사를 벌인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정 회장은 부친의 사업 가운데 고인이 생애 말기에 온힘을 쏟은 대북사업을 이어받았지만 부친 사망 이후 잇단 정치적, 법적 공방에 휘말리면서 힘들게 사업을 이끌어왔다. ▲ 현장 및 영안실 표정= 계동 사옥 현장에는 현재 정몽구 현대자동차회장과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을 비롯한 현대 관계자들이 나와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며 향후 대책을 논의했다. 투신 현장에는 서울 종로경찰서장 등이 나와 투신장소와 사무실 등에 대한 조사를 벌이고 있고, 사옥 주변에 폴리스라인과 바리케이드를 설치해 일반인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정 회장의 시신은 발견 이후 2시간 이상 계동사옥에 보관됐다 이날 오전 8시10분께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으로 이송됐고, 빈소는 선친의 빈소로도 사용된 이 병원 3층 30호실에 마련됐다. 정 회장 가족들은 서울 성북구 성북2동 330번지 양옥 2층 자택에서 비보를 접하고 시신이 안치될 예정이었던 서울아산병원으로 서둘러 갔으며, 집에는 운전사와 가정부만 지키고 있고 외부인의 출입은 목격되지 않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심인성. 이 율 기자 hadi@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