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기업이 많이 생기고 잘 움직여야 경제 성장에 기여하고 고용도 증대됩니다. 미국은 지난 96년 벤처기업이 국내총생산(GDP)의 33%, 2백만명의 일자리를 창출해 냈습니다."(1998년 1월19일 '대통령 당선자, 국민과의 TV대화') 출범 초기 김대중 정부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만신창이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실마리 찾기였다. 김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벤처기업을 적극 육성해 고부가가치 제품을 만들어 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겠다"고 다짐했다. 이후 98년 5월 중소기업청의 '벤처기업 확인제도'를 시작으로 금융 세제 인력지원 등 범정부 차원의 특혜 조치가 봇물처럼 쏟아졌다. 광풍처럼 불어닥친 '벤처 붐'은 김대중 정부 출범 2년만에 코스닥 지수를 사상 최고치인 292.55(2000년 2월)까지 밀어올리며 DJ노믹스의 가장 성공적인 화두(話頭)로 자리매김하는 듯했다. 그러나 과부하가 걸린 벤처 엔진의 순항은 오래가지 못했다. 정부의 '퍼주기식 지원'이 낳은 벤처 거품이 한순간에 터지면서 성장 동력이 급속히 고갈됐다. 벤처 시장은 정.관.경 유착에 따른 각종 게이트와 의혹이 난무하는 '비리의 온상'으로 전락했다. 벤처 성장을 대표하는 코스닥지수는 지난해 9월 46.05까지 곤두박질한 뒤 지금은 50포인트 언저리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 경제위기 탈출구로는 기여 벤처산업의 급성장은 외환위기로 침체된 경제를 되살리는 기폭제가 됐다. 정부 확인을 받은 벤처기업(누계 기준)은 98년 2천42개사에서 △99년 4천9백34개 △2000년 8천7백98개 △2001년 1만1천3백92개로 급증, 경기 회복을 이끌었다. 특히 스타 벤처기업이 속속 등장해 '한국의 빌 게이츠'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기도 했다. 20∼30대의 젊고 유능한 엔지니어들이 창업 대열에 가세, 급격하게 치솟던 청년 실업을 상당 부분 해소하는 효과도 거뒀다. ◆ 자원배분 왜곡과 시장질서 붕괴 그러나 정부의 과도한 직접 지원은 오히려 벤처산업의 자생적인 성장을 가로막고 벤처기업인의 도덕적 해이를 부추기는 등 심각한 부작용으로 이어졌다. 대표적인 것이 전세계에 유례가 없는 벤처기업 확인제도. 정부는 형식적인 요건만 갖추면 벤처 확인서를 내주고 자금 기술 인력 입지 정보 등 갖가지 특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정부의 눈먼 돈을 수혈받은 한계 기업이 버젓이 유망 기업으로 행세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더욱이 벤처 확인이 사실상 정부 보증으로 인식되면서 벤처기업과 코스닥시장은 '합법적인 투기장'으로 변질됐다. 거대한 부동자금과 조직폭력배의 지하자금은 물론 개미 투자자의 쌈짓돈까지 몰려들어 '묻지마 투자'가 유행처럼 번졌다. 배영일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정부가 무리한 지원정책을 강행한 탓에 벤처기업들이 연구개발과 경영 선진화보다는 머니게임(돈놀이)에 치중하는 역효과를 불러 왔다"고 지적했다. ◆ 신뢰회복과 인프라 구축이 관건 제대로 된 벤처산업을 일구기 위해선 이제라도 정부가 한발짝 물러나야 한다는 지적이다. 첫번째가 벤처기업 확인제도 폐지다. 정부의 특혜 지원 고리를 끊어 벤처기업이 자생력을 키울 수 있는 경쟁 환경을 열어줘야 한다는 얘기다. 이병기 한국경제연구원 전문위원은 "벤처 확인제도가 지속될 경우 '무늬만 벤처'가 다시 활개치고 시장질서가 교란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코스닥시장 진입·퇴출 요건을 엄격하게 만들어 부실.불법 벤처기업을 신속히 걸러내고 투자자 보호장치를 보강해 시장에 대한 신뢰를 되찾는 것도 급선무다. 이와 함께 엔젤 투자자와 벤처 캐피털의 투자심리를 북돋울 수 있도록 벤처투자조합과 인수합병(M&A) 시장을 활성화하는 한편 산.학.연 간의 기술 및 경영 협력네트워크를 강화, 벤처기업의 성장 잠재력을 키우는 일도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정한영 기자 ch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