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만 공장건설에 실패했더라면..." 1996년 10월31일. 38년 동안의 직장생활중 가장 고통스런 기간으로 접어든 날이다. 충남 아산만 고대공단에서 아산만 냉연공장(연산 1백30만t) 건설을 위해 첫삽을 떴던 날이다. 미국 LA지사장(전무)을 맡고 있다가 아산만 공장을 건설하라는 회사의 "특명"을 받았다. 그룹이 철강 사업부문을 확장하던 시점이어서 절체절명의 공사였다. 걱정이 앞서기도 했으나 충분한 자신감도 있었다. 당시 호경기였고 향후 경기전망도 낙관적이었기 때문이다. 24개월만에 완공하겠다는 목표를 수정해 21개월로 앞당기기로 했을 만큼 현장 직원들의 사기도 충만해 있었다. 아산만 매립지에 강철파일을 박는 소리는 우렁찼다. 그해 12월20일부터 97년 2월20일까지는 한겨울이라 콘크리트 타설이 어려운 기간이었으나 공기단축에 나섰다. 야외용 대형 보일러를 동원하고 천막을 쳐 타설현장을 보온하면서 기초를 다졌다. 98년 3월이면 설비를 갖추고 늦어도 그해 8월이면 시운전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런데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장미빛 스케줄은 97년 11월 외환위기라는 복병을 만났다. 하청업체들이 하나둘 부도로 쓰러져 나갔다. 해외 설비공급 업체에 설비선적을 한두달 당겨달라고 했던 요청이 하루아침에 한두달 이상 늦춰달라는 다급한 상황으로 급반전됐다. 원.달러 환율이 가파르게 올라 설비조달 비용은 급상승했다. 눈물을 머금고 공사를 중단해야 했다. 그러나 그룹의 철강사업 명운이 걸렸으니 포기할 수는 없었다. 현장 건설본부장(부사장)으로서의 자존심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룹의 의지 역시 분명했다. 98년 8월 어렵사리 공사를 재개했지만 IMF 관리체제하의 공사여건은 혹독했다. 공단조성에 필요한 정부 지원이 끊겨버렸다.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고 도로 전기 공업용수 등 대부분의 인프라를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포장도로가 뚫리지 않았고 서해대교 건설이 차일피일 연기돼 평일날 서울까지 가는데 5시간 넘게 걸렸다. 타고 가던 승용차가 눈길에 미끄러져 주변 논으로 처박히는 바람에 죽을 고비를 넘겼다. 정부 지원중단으로 20km 떨어진 아산호수에서 공업용수를 끌어오려던 계획도 틀어졌다. 4~5km 거리의 저수지에서 농업용수를 끌어다 댈 수밖에 없었다. 흙탕물이어서 수시로 필터를 교환해야 했으며 취수탑을 세우고 일일히 배수관을 묻어야 했다. 전기도 끌어와야 했는데 주민들이 송전철탑 건설에 반대한 탓에 전선을 지하에 묻었다. 60년대말 포스코가 포항 황무지에서 제철소를 건설하던 풍경이 아산만에서 그대로 재현된 셈이다. 악전고투였다. 당초 공사비로 9천억원을 책정했는데 기본 인프라 건설 등에 무려 3천억원이나 더 쏟아부어야 했다. 99년 11월3일 3년 고생끝에 준공식을 가졌다. 가슴속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IMF직후 국내에서 대규모 공장을 완공한 사례가 없었고 전세계 철강업계에서는 최대 규모의 공사였다. 컴퓨터 제어시스템을 도입한 결과 원료 입고에서부터 제품 출고까지 모든 작업이 자동화된 첨단공장이다. 외국 철강업체들은 "꿈의 공장"이라며 찬사를 보냈다. 올해 7월부터 영업이익을 내는 등 정상 궤도에 오른 아산만 공장. 당시 건설을 체념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직원들의 애사심과 오기가 발동하지 않았더라면... 아찔하기만 하다. 정리=김홍열 기자 com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