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출신 소설가 현기영씨(62·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가 산문집 '바다와 술잔'(화남,9천원)을 펴냈다. 지난 89년 이후 13년 만에 낸 그의 두번째 산문집이다. 현씨는 한국문학사상 처음으로 제주도 4·3항쟁을 소설화한 '순이삼촌'(1979) 및 '마지막 테우리'(1994) 등으로 문단 내외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작가다. 총 41편의 산문으로 구성된 이번 책에서 작가는 소설에서 미처 다루지 못했던 자기고백을 담고 있다. 1부 '인간과 대지'는 작가의 내면고백을 담은 것으로 청소년 시절부터 그의 성장을 지켜본 제주도 바다와 용두암 바위에 얽힌 여러가지 회상 및 추억담들로 채워져 있다. '요즘 들어 나는 잠자리가 뒤숭숭할 정도로 전에 없이 꿈을 많이 꾸는데,아마 그것도 마음이 심약해지고 감상적이 된 탓일 게다'('바다와 술잔' 중)에서 알 수 있듯 사회·역사적인 문제에 언제나 올곧은 비판의 목소리를 내놓던 작가도 세월의 무게 앞에서 조금씩 약해져가고 있는 모습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그렇지만 3부 '상황과 발언'에 이르면 그런 유약한 이미지는 간 곳 없고 어느새 우리를 둘러싼 현실에 날카로운 비판의 메스를 들이민다. 군사정권의 몰락과 함께 우리사회의 새로운 권력으로 등장한 언론의 폐해를 지적한 '여론의 타락',조폭 영화 '친구'의 대히트와 박정희의 부활 움직임을 비판적으로 고찰한 '눈뜨는 망령',인터넷 만능풍조를 꼬집은 '터미네이터를 이기기 위하여',9·11테러와 미국의 보복전쟁 실상을 분석한 '그날 이후' 등은 작가의 궁극적 지향점이 어디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글쟁이는 기본적으로 시대상황에 대한 비판적 에세이를 쓸 수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현씨는 내년 봄부터 계간 '창작과 비평'에 새 장편소설을 연재할 계획이다. 새 소설의 소재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닌 당대 현실에서 찾을 것이라고 한다. 문란한 현대인의 성 풍속도도 생각 중인 소재의 하나라고 그는 말했다. 김재창 기자 char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