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사우디아라비아 외무장관은 "미국은 결코 사우디 영토를 밟고 이라크 공격을 감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의 우방인 사우디가 테러와의 전쟁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분명히 한 것이다. 미 정부 산하기관인 안보정책위원회(DPB)의 보고서가 사우디를 테러조직과 연계하면서 양국 관계가 이처럼 악화됐다. 사우디와 미국은 전통적으로 협력해 왔지만 현재는 미국의 방식과 사우디 길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드러나고 있다. 사우디에서는 외국인을 포함한 모든 중범죄자에게 재판을 거치지 않고 태형(채찍질)을 가하거나 목을 베기도 한다. 이러한 행위는 헌법상 인간의 존엄성을 규정해 놓고 있는 미국인들에게는 납득할 수 없는 조치다. 하지만 사우디는 그들의 행위가 이슬람의 율법에 따른 것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9·11사태 이전까지 사우디는 미국의 안전한 석유 공급처 역할을 해오는 등 경제 외교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작년 9월11일 뉴욕과 워싱턴에서 발생한 비행기납치 사건에서 납치범 19명 중 절반인 15명이 사우디출신으로 밝혀지면서 상황은 바뀌기 시작했다. 미국은 또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가담한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알 카에다 포로들을 관타나모 해군기지에 억류했으며,여기에는 사우디인들도 포함돼 있다. 이후 양국은 서로의 관계를 재점검하기 시작했고 현재는 서로를 믿을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왜 9·11테러범 중 사우디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했을까. 사우디 정부는 공식적으로 "자국의 국적을 소유한 테러범들은 사우디와 무관하며 이로 인해 사우디의 정체성마저 흔들리고 있다"고 울분을 토했다. 빈 라덴이 미국과 사우디 관계를 벌려놓기 위해 사우디 출신 조직원들을 의도적으로 테러에 가담시켰다는 설도 있다. 이와 관련,미국 빌 클린턴 정부 때의 한 고위 관리는 최근 "두명의 사우디 왕자가 1995년 리야드의 미군기지 폭파사건의 장본인인 빈 라덴에 자금을 지원했다"고 주장,큰 충격을 주었다. 현재 사우디 정부는 외부로부터의 곱지 않은 시선뿐 아니라 내부의 어려움에도 봉착해 있다. 온건 이슬람 국가를 견지해온 사우디의 대다수 국민들은 빈 라덴에 대해 동정심을 갖고 있다. 다른 아랍국가의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을 혼내 준 빈 라덴을 영웅시하는 분위기다. 게다가 파드 국왕은 현재 지병으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치료 중이며,7명의 왕자 중 압둘라 왕자가 그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하지만 압둘라는 그의 아버지보다 정국 장악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할 때 사우디와 미국의 관계회복을 위한 돌파구는 막혀 있는 상태다. 특히 미국은 사우디로부터의 석유수입을 상당량 줄이는 등 거리를 두고 있다. 또 사우디는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는 것을 극력 반대하고 있다.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한다면 리야드 미군기지를 이용해야 하고 이라크도 이에 맞서 사우디 영토에 공격을 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우디는 미국이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을 멈추지 않고 이라크를 공격하면 두달 동안 석유수출을 중단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때문에 워싱턴은 사우디가 강성화되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사우디 정부의 자금이 하마스 등 테러단체들로 유입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사우디와 미국간에는 신뢰를 회복하느냐 갈라서느냐의 테스트가 진행 중이다. 정리=권순철 기자 ikee@hankyung.com ◇이 글은 최근 아시안월스트리저널에 실린 'The Saudi Way'를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