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호 < 한국회계연구원 상임위원 > IMF 경제위기와 대우사태, 동아건설의 침몰, 미국 엔론사의 파산 배경에는 부실한 기업회계가 있었다. 지금 우리에게 회계투명성이나 분식회계라는 말은 더 이상 생소한 용어가 아니다. 얼마전 금융감독위원회 산하 증권선물위원회가 1999회계년과 2000회계연도의 결산에서 분식회계를 행한 대기업 계열사를 비롯 13개사에 중징계를 내렸다. 외부감사를 담당했던 회계법인과 회계사들에 대해서도 제재조치를 내려 파문이 일고 있다. 분식혐의로 제재조치를 당한 기업과 회계사들은 문제가 된 회계기준의 해석상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기업회계기준이 불명확하다는 비판여론도 있는 듯하다. 회계기준의 완전성은 재무제표 작성자인 기업의 의지, 감시자로서 외부감사인의 역할과 함께 회계투명성의 확보에 필수적인 요소다. 따라서 회계기준이 논리적이고 명확해야 함은 자명하다. 그러나 명확한 회계기준이 반드시 특정 거래에 대한 회계처리를 일률적으로 규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 분식회계 사건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영업권의 상각에 관한 규정도 마찬가지다. 기업회계기준에 따르면 피투자회사에 대한 투자제거차익중 영업권의 성격으로 보는 부분은 '20년 이내 합리적인 기간에 상각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영업권의 반대 개념인 '부(負)의 영업권'도 마찬가지 논리가 적용돼 20년 이내 합리적인 기간에 환입해야 한다. 회계전문가가 이와 같은 규정을 상식적으로 해석한다면 합리적인 기간이란 영업권 또는 부의 영업권을 초래한 설비자산의 내용연수라는 결론에 쉽게 도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영업권은 구입한 또는 투자대상인 기업에 속한 설비자산을 사용하여 미래에 낼 수 있는 초과수익력을 나타내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상식과 실질을 무시하는 경우 비상식적인 억지 해석이 나온다. 만일 '합리적인'이라는 표현을 무시한다면 상각가능기간은 20년을 초과하지만 않으면 되므로 영업권을 일시에 상각하여도 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는 기업회계기준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마치 신호등이 노랑불로 바뀐 뒤에도 과속으로 도로를 질주하던 차량이 사고를 일으키고는 잘못이 없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과 같다. 노랑불 신호등의 실질적이고 합리적인 의미는 주위를 살펴보고 위험하지 않다면 멈추지 않고 천천히 주행하여도 좋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를 무시하고 신호교체시 과속주행으로 사고를 내는 것은 분명 잘못된 행위다. 해석상의 논란을 피하기 위해 예를 들어 '영업권은 반드시 10년에 나누어 상각한다'라고 규정한다면 겉으로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명확한 지침이 된다. 그러나 그런 기준은 오히려 매우 비논리적일 수 있다. 거래마다 실질 내용이 다를 수 있으므로 '왜 7년은 또는 15년은 안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업의 환경은 다양하며 거래 또한 매우 복잡하므로 모든 거래상황에 대해 일률적이거나 너무 구체적인 회계방법을 제시하는 것은 오히려 왜곡된 정보를 초래할 수 있다. 미국의 엔론사 파산 이후 미국의 회계기준이 요리책(cook book)과 같이 자세한 지침을 제공하려다 정보왜곡을 조장시켰다고 비난받은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국제회계기준위원회(IASB)는 자세하지는 않지만 합리적인 원칙(principles)을 제시하는 접근방법을 쓰고 있다. 현재 우리의 회계기준제정 접근방법도 이와 유사하다. 따라서 회계기준에는 일견 모호하다고 비판받을 수 있는 '합리적인' 또는 '적절한' 등과 같은 표현이 종종 사용되고 있다. 이 경우 구체적인 해석과 적용의 판단은 수준 높은 훈련을 받은 회계전문가의 몫인 것이다. 회계전문가인 외부감사인이 충분한 자질을 가지고 있고 독립성을 유지한다면 회계기준이 비상식적으로 해석돼 정보의 왜곡을 초래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한국의 기업회계는 지금 대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IMF체제 이후 투명성을 높이고 국제적인 정합성을 목표로 회계기준은 여러 차례 수술대에 올라 손질되고 있다. 앞으로 실질적인 판단에 대한 회계전문가의 역할과 책임은 증가할 것이다. 한국은 지금 투명성 확보를 위한 진통을 겪고 있으며 투명성을 목표로 한 회계기준의 개혁은 이미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