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초. 외환은행의 임원 전원은 김경림 행장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다들 마음을 비웠으니 오는 3월 주총에 앞서 단행될 임원급 인사때 행장이 부담을 갖지 말라'는 뜻이었다. 어떻게 하면 1년이라도 더 은행 임원 자리를 유지할지를 고민하던 이전과 비교하면 색다른 모습이었다. 지난해 11월 합병한 국민은행 임원들은 요즘 좌불안석(坐不安席)이다. 이달 말로 등기임원을 제외한 집행임원의 계약기간이 끝나기 때문이다. 집행임원은 물론 등기임원도 임기에 관계없이 물갈이해 조직 통합을 이룬다는 것이 국민은행의 계획이다. 이러다보니 벌써부터 '○○○본부장은 어렵다'느니, 'XXX본부장은 자리를 지킬 것'이라는 등의 '카더라통신'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런 소문은 급기야 옛 국민.주택은행 출신간의 암투로도 비화되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은행 임원들은 '파리목숨'이 됐다. 대부분 은행은 3년 임기가 보장되는 등기임원 수를 은행장과 감사를 포함해 2∼3명 가량으로 제한하고 있다. 나머지는 모두 계약직인 집행임원이다. 이들의 임기(계약기간)는 고작해야 1∼2년. 경영 실적이 좋지 않으면 재계약을 하기 힘들다. 중도 퇴진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은행 임원은 '임시직원'의 줄임말"(H은행 K이사)이라는 얘기가 결코 과장으로만 들리지 않는 이유다. 은행 임원들에게 몰아닥친 변화는 짧아진 임기만이 아니다. '군림하는 임원'은 옛말이 됐고, 업무 일선을 뛰는 '영업 요원'이 됐다. 지난 2일 외환은행 본점. 이연수(기업금융본부장) 이수신(소매금융본부장) 부행장은 올 이익 목표를 제시하고 김경림 행장과 이행합의서(MOU)를 맺었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언제든지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단서 조항과 함께. 이런 식의 MOU 체결은 은행가에서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대부분의 은행이 외환위기 이후 수익 위주 경영을 모토로 사업본부제를 도입했다. 본부장을 맡고 있는 임원은 은행장과 MOU를 체결하는 것이 신풍속도로 자리잡았다. 각 본부장(임원급)에게 인사 및 예산 등에 대한 전권을 주는 대신 경영 실적에 대한 책임을 묻는 셈이다. 행장실과 같이 꾸며 놓았던 임원실을 영업일선으로 '강등'시킨 은행도 늘고 있다. 국민은행이 단적인 예다. 임원실을 없애는 대신 임원들을 사업본부의 한 켠에 마련된 사무실로 몰아냈다. 영업 일선과 호흡을 맞추라는 뜻이다. 김종욱 한빛은행 부행장은 "위로 올라갈수록 더욱 일이 많아지고 힘들어지고 있다"며 "그만큼 임원들의 경쟁력도 높아지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은행간 치열한 생존 경쟁이 임원들의 능력 경쟁을 부추기고 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이나 '연'을 바탕으로 임원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정광우 제일은행 부행장과 김규연 서울은행 부행장은 능력도 능력이지만 운이 좋은 케이스로 꼽힌다. 두 사람 모두 외환위기 전에 임원 자리에 올랐다. 외환위기 이후 두 은행의 대주주가 각각 외국투자자와 정부로 바뀌면서 조직을 잘 아는 임원을 필요로 한 덕분에 '장수'하고 있다는 게 금융계의 중론이다. 이렇게 운좋은 사람 외에 정치권 실세에게 '줄'이나 '연'을 대 임원 자리에 올랐다는 사람도 여전히 많은 것으로 거론된다. 외환위기 이후 은행가에 몰아닥친 '임원 시스템 변혁'이 아직은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는 지적을 받는 이유다. 김준현 기자 kim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