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의 리메이크 바람은 사실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올 들어서도 프랑스 영화「비지터」를 리메이크한「저스트 비지팅」과 고전「혹성탈출」의 팀 버튼 감독 버전이 소개돼 인기를 끌었다. 아무리 재밌는 소재의 외국 영화라도 자막읽기를 유독 싫어하는 미국 관객들의 특성상을 고려해 외국어를 그대로 번역, 상영하지는 않는다. 철저하게 할리우드식으로 바꾼다. 원작이 가진 고유 문화적 색채는 줄이되, 자동차 추격신이나 폭발신 등외양은 되도록 화려하게 꾸며 미국인들의 입맛에 맞추는, 장삿속을 숨기지 않는 것. 톰 크루즈와 페넬로페 크루즈가 촬영 도중 실제 연인 사이로 발전 화제가 됐던「바닐라 스카이」도 리메이크 영화의 특성을 드러낸다. 원작은 스페인의 최고 흥행작인 알레한드로 아베나바르의「오픈 유어 아이즈」.「제리 맥과이어」에서 톰 크루즈와 호흡을 맞췄던 (카메론 크로우) 감독이 기꺼이 메가폰을 잡았다. 인생을 즐길 줄 알며 부와 매력을 지닌 잘 생긴 남자 데이빗(톰 크루즈). 그는 한 여자와 결코 두번 이상 자는 일이 없다. 그런 그가 파티장에서 소피아(페넬로페 크루즈)를 보고 첫 눈에 반한다.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미소를 짓는 소피아는 데이빗이 꿈에 그리던 여자. 그러나 그녀는 데이빗의 유일한 친구 브라이언(제이슨 리)의 애인이다. 데이빗에게도 '줄리'(카메론 디아즈)'가 있다. 줄리는 데이빗을 사랑하지만 데이빗에게 그녀는 '섹스 파트너'일 뿐이다. 데이빗의 외도를 알고질투에 사로잡힌 줄리는 급기야 자동차를 몰고 다리 아래로 돌진해 동반 자살을 시도한다. 사고 후 줄리는 목숨을 잃고, 데이빗의 얼굴은 흉측하게 일그러진다. 인생이 바뀌는 순간이다. 이야기는 흉측한 얼굴을 가면으로 가린 채 정신병동에서 데이빗이 의사와 상담하면서 과거를 기억해내는 장면과 교차 편집돼 전개된다. 자포자기 상태로 살아가던 데이빗은 어느 날 술에 취한 채 길거리에 쓰러지고,그 이후 심상치않은 일들을 겪는다. 의사가 자신의 얼굴을 본래 모습대로 고쳐주는가 하면 소피아도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 원했던 일들이 하나씩 이루어 지는데... '태생'이 따로 있는 만큼 원작과의 비교는 피할 수 없는 게 리메이크의 운명. 「오픈 …」는 하루 아침에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져버린 한 남자를 통해 꿈과 현실과의 경계를 묻는 `철학적'인 영화다. 현실과 꿈이 교차하는 '호접지몽'의 다층적 구조와 멜로, SF, 사이코 스릴러 등 온갖 장르가 섞인 독특한 구조로 돼 있다. 「바닐라…」는 원작을 충실히 살린다. 줄거리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일부 대사나 장면은 그대로 차용했다. 부잣집 레스토랑 아들이었던 주인공과 팬터마임 배우 소피아의 직업이 각각 출판사 사장과 간호 보조사로 바뀌고, 데이빗의 인생이 한순간에 바뀌는 것과 관련해 이사회의 음모 부분이 추가됐다. 그러나 두 작품의 분위기는 확연히 다르다. 전체적으로 암울하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풍겼던 원작과 달리「바닐라…」는 한결 밝다. 화려한 파티장과 사무실 등 세트는 보다 세련돼졌고, 베드신의 농도는 더욱 짙어졌으며, 멜로도 강화됐다. 무엇보다 톰 크루즈와 카메론 디아즈라는 할리우드 대스타의 위력에 힘입은 바가 크다. 헌데 스타의 후광이 너무 컸던 탓일까. 각각의 캐릭터는 맞지않은 옷을 입은 듯 겉도는 느낌이다. 톰 크루즈의 미소는 뭇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하기에 충분하지만한 순간에 인생의 극과 극을 맛본 자의 비극을 표현하기에는 도식적이고 깊이가 얕다. 특히 카메론 디아즈는 신비하면서도 팜므파탈의 분위기를 물씬 풍겼던 원작의 '줄리'역을 제대로 살리지못한 채 '하룻 밤에 네번'만을 강조하는 단순한 섹시 미인으로 부유한다. 스릴러를 강조하기위해 첨가된 이사회의 음모 부분이 지루하게 반복되고,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의 호흡도 느려지는 편. 원작에서 '소피아'역을 맡은 페넬로페 크루즈가 다시 같은 배역을 맡아 또다른 매력을 선보인다. '오리지널만한 리메이크는 없다'는 속설이 적용된 걸까. 그래도 원작을 보지않았다면 새로운 형식의 영화를 경험할 수 있다. (서울=연합뉴스) 조재영기자 fusionjc@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