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테러보복을 위한 준전시 체제에 돌입한 가운데 미국의 전통적 우방인 유럽 국가들 사이에 테러보복 전쟁에 대한 신중론이확산되고 있다. 유럽연합(EU),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유럽 주요 정치기구 및 개별국가들은 전쟁보다 더 참혹한 연쇄테러를 당한 미국을 일제히 애도하고 지지하고 있다. 서유럽은 테러와의 투쟁을 선언했으며 이번 공격이 외국 및 외국인의 소행으로 밝혀질 경우 이를 미국뿐 아니라 나토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해 자위권을 발동하겠다고 천명했다. 테러를 응징하겠다는 미국의 입장을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분명한 증거없이 이번 사태를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의 소행으로 간주하고 그가 은신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공격 준비에 들어가자 서유럽은 보복전 신중론을 거듭 제기하고 있다. 토니 블레어 영국총리는 16일 CNN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테러와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말해 부시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이번 사태를 전쟁으로 규정했다. 블레어 총리는 유럽 정치지도자들중에서 처음으로 대미 테러를 전쟁으로 규정한 셈이나 그 역시 미국의 테러 보복전에 대해서는 신중론을 피력했다. 그는 테러에 대한 군사적 대응 방식을 거론하기는 아직 이르다며 "흥분을 가라앉히고 냉철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테러 범인이 누구인지 "상당히 분명해졌다 하더라도 확실한 증거를 찾는것이 중요하다"며 미국이 보복공격을 전개하기 이전에 테러 범인을 명확히 입증할 것을 주문했다. 안토니오 마르티노 이탈리아 국방장관은 성급한 보복전을 경계하는 한편 미국에 ▲보복전에 대해 유엔 승인을 얻고 ▲우방국들과 대테러동맹을 구축할 것을 제의했다. 마르티노 장관은 테러응징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걸프전에서 그랬던 것처럼 미국은 단독으로 행동해서는 안되며 동맹을 형성하고 유엔 승인을 얻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한 테러 배후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보복전을 개시해도 되느냐와 아프가니스탄에 대해서도 빈 라덴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는 이유만으로 대규모공격을 가할 수 있느냐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하비에르 솔라나 EU 공동외교안보 대표 역시 유엔이 주축을 이루는 대테러 동맹구축을 촉구하고 이번 테러 범인을 특정 문화나 종교와 결부시키지 말 것을 당부했다. 이에 앞서 리오넬 조스팽 프랑스총리, 조지 로버트슨 나토 사무총장, 루이 미셸벨기에 외무장관, 루돌프 샤르핑 독일 국방장관 등 서유럽 주요 지도자들은 성급한 테러 보복전에 대해 일제히 경고했다. 조스팽 총리는 "우리가 이슬람이나 아랍세계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고 강조했으며 위베르 베드린 프랑스 외무장관은 이번 사태가 이슬람과 기독교간 "문명충돌"로 이어져서는 안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로버트슨 나토총장은 비이성적 보복전을 일으키는 것은 테러분자에게 굴복하는 지름길이라고 경고했으며 EU 의장국인 벨기에의 미셸 외무장관은 "EU가 경계태세에 돌입했으나 전쟁중인 것은 아니다"라며 미국에 신중한 대응을 촉구했다. 샤르핑 장관은 테러 직후 고조되고 있는 전쟁 히스테리를 경고했으며 독일에서는 미 군사행동에 동참할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미국의 제1 우방이라고 할 수 있는 서유럽이 이처럼 보복전 신중론을 제기하고 것은 유럽 역시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테러응징을 위한 군사행동에는 범인 입증등 몇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는 일반 원칙에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유럽은 또 미국의 군사행동이 시작될 경우 이를 어느 선에서 지원할 것이냐를 놓고 고민에 빠져 있다. 서유럽은 미국에 대한 공격을 동맹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는 나토 선언을 통해 대미 군사 지원 발판을 마련해놓은 셈이지만 막상 공격이 시작되면 개별 국가별로 참전 또는 단순 병참지원 여부와 그 수위를 놓고 격렬한 논란이 벌어질 전망이다. 유럽 국가 지도자들은 미국에 대해 테러 응징 신중론을 제기하는 한편 내부적으로는 미국이 전쟁을 개시할 경우의 대응 방식에 대한 검토를 시작했다. (파리=연합뉴스) 현경숙특파원 ks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