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폰기는 유흥업소가 많기로 도쿄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번화하다.

또 외국인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라 일본 땅에서도 이국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곳으로 통한다.

자유분방한 서구적 분위기가 넘치다 보니 답답한 일상 생활에 지친 샐러리맨과 학생등 젊은이들의 발길이 24시간 끊이지 않는다.

록폰기에서도 인파가 가장 많이 몰린다는 록폰기 지하철 역 앞 교차로.이 일대를 지나는 행인들은 누구나 수십미터 전방의 건물 옥상에 우뚝 선 노란색의 특이한 광고탑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진로소주의 "진로"다.

일본 수출용 제품을 본따 녹색 술병에 노란 띠를 두르고 빨간 영문 글자로 "JINRO"라고 씌여져 있다.

이 탑이 록폰기에서 갖는 의미는 각별나다.

멀리서도 눈에 띄기 쉽도록 높이 서 있는데다 녹색,노란색,그리고 글씨의 붉은 색이 함께 어우러져 보는 사람들에게 강렬한 이미지를 던져 준다.

랜드 마크 같다는 느낌마저 풍긴다.

하지만 진로소주의 일본 법인인 진로 재팬이 일본 시장에서 갖고 있는 비중과 브랜드 파워에 비하면 이 탑의 명성과 의미는 아무 것도 아니다.

진로를 단일 브랜드로 일본 소주 시장 "넘버 원"에 올려 놓고 있는 진로 재팬은 돌풍의 진원지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두꺼비 진로에 대한 일본 소비자들의 애정과 관심은 판매 수치 하나만 봐도 넉끈히 짐작할 수 있다.

1979년 4천2백상자(7백ml,12병)로 시작한 진로의 연간 판매량은 15년만인 1994년 1백만상자를 돌파한데 이어 작년 한햇동안 4백70만 상자를 넘어섰다.

진출 초기에는 실적이라고 내세우기도 어려울 만큼 미미했던게 사실이지만 지금의 상황은 1백80도 다르다.

판매 증가 속도도 폭발적일 뿐 아니라 두꺼비 명성이 일본 열도 외진 곳까지 미치지 않는 데가 없다.

소주라면 의레 진로를 찾는 일본 애주가들이 빠른 속도로 늘다 보니 일본인들 사이에서 "한국은 몰라도 진로는 안다"는 웃지 못할 농담까지 나오고 있다.

진로 재팬측은 두꺼비가 일본 시장을 장악하게 된 비결로 첫째, 진로 소주의 우수한 제품력 둘째,경쟁 일본 제품보다 오히려 10% 정도 비싸게 책정한 고가격 정책 셋째,현지 유통업체들과의 끈끈한 신뢰구축 및 공생전략 그리고 마지막으로 철저한 브랜드 관리 노력을 꼽는다.

그러나 진로 재팬의 성장을 지켜 본 주일 한국 기업인들은 두가지를 더 보탠다.

진로 재팬을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이끌어 온 김태훈(49) 사장의 리더십과 경영노하우 및 때마침 불어닥친 한국 붐이 진로의 성장 스피드에 가속도를 불어 넣어 주었다는 것이다.

서울 출생으로 한양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한 김사장의 첫직장은 의류업체인 서광이었다.

서광의 도쿄사무소 직원으로 근무하던 그는 86년 6월 진로에 합류했다.

그리고 30대 중반 이후의 인생을 "두꺼비" 키우는데만 바쳤다.

진로맨이 된 당시만 해도 진로의 이름을 알아주는 일본 업체와 소비자들은 많지 않았다.

지금은 현지 법인에 연면적 6백여평의 번듯한 자체 사옥을 갖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진로는 도쿄사무소를 두고 있었을 뿐이었고 판매량은 연간 20만상자가 고작이었다.

88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한국 붐이 고조되면서 제품 이미지와 판매량이 급신장하자 진로 소주의 성공 가능성을 확인한 그는 1988년 현지법인 설립 작업을 주도했다.

장기적인 자체 영업망 확보와 독자판매전략 수립을 위해서는 별도 법인화가 필수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감사를 거쳐 90년 4월 사장직을 맡은 그는 이때부터 진로 키우기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광고판촉활동을 강화하고 제품을 다양화하는 한편 유통망 확장을 위해 일본 파트너들과의 협력관계를 대폭 확대해 나갔다.

단순히 소주를 파는데 그치지 않고 소주문화를 일본 사회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음식점경영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하고 95년 9월 매입한 록폰기 본사 사옥에 같은 해 12월 "진로 가든"을 오픈했다.

한국식 고급 식문화를 일본 사회에 전파하는 안테나 역할의 레스토랑이었던 셈이다.

그는 일본 시장에서의 성공을 위해서는 두가지가 꼭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자체 유통망이 취약한 상태였던 만큼 무엇보다 든든한 현지파트너를 골라 탄탄한 신뢰관계를 구축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또 진로의 이미지를 "소주"에만 한정시킨다면 장기적 수요확대가 어렵다고 믿었다.

김사장은 이에 따라 대형 주류도매업체 3개와 손잡고 이를 통해 일본 시장을 파고 드는 전략을 밀고 나갔다.

이미지 제고를 위해서는 광고전략의 초점을 "진로는 어디까지나 진로" "누구나 즐겁게 마시는 술"이라는데 맞추었다.

판매가 어느 정도 성장 궤도에 오르자 96년부터는 TV광고도 실시하기 시작했다.

한국상품,한국업체들의 광고가 전파를 타는 일이 드물었던 이때만 해도 진로의 TV광고는 일본업체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제품력과 앞날의 성공에 대한 자신감이 없고서는 맘먹기 어려운 결단들이었다.

98년 단일브랜드로는 처음으로 일본 시장 1위에 오른 진로의 위력은 시간이 흐를수록 영향권을 더 빠른 속도로 넓혀 가고 있다.

올해 판매량이 5백만 상자를 넘어설 것은 확실하다는데 직원들의 장담이다.

자신감을 얻은 진로 재팬은 일본업체들에 의존해 왔던 유통방식을 개편,올해 부터는 대형 도매업체를 경유하지 않고도 직접 일선 도매상과 주류판매점과 거래하기 시작했다.

광고,판촉 전략에 이어 가격정책도 자체 컨트롤 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 것이다.

진로 재팬을 우뚝 세우는 과정에서 김사장은 중대한 생사의 고비를 한번 넘겼다.

과중한 업무와 싸우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그는 대동맥판막부전증으로 95년 봄 대수술을 받고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주위의 권유로 진찰을 받기 위해 들렀던 병원의 의사가 그의 건강상태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 자리에서 입원과 수술지시를 내린 덕에 건진 생명이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앞으로의 계획과 인생설계가 그만큼 더 큰 뜻을 지니고 있다.

그는 진로재팬을 일본 시장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종합식품업체로 키우겠다는 포부를 꿈꾸고 있다.

이와 함께 철저한 현지화와 밀착 마케팅을 발판으로 한국의 국민브랜드 "진로"가 한,일 양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잇는 문화의 다리가 될 수 있도록 만들겠다고 말했다.

도쿄=양승득 특파원 yangs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