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에 따라 사투리가 다르고 음식맛이 다르듯 노래에도 특징이 있게 마련이다.

국악에서 황해도 평안도지방에 전승돼온 잡가 민요 등을 경기소리 남도소리와 구분지어 ''서도(西道)소리''라고 부르는 것도 그 독특함 때문이다.

서도소리는 대륙과 인접한 거친 풍토에서 이민족과 겨루며 살아온 관서지방민들의 생활속에 면면히 이어져온 소리다.

그래서인지 씩씩하고 유장한 느낌을 주고 격식없는 노랫말이 동적인 반면 구슬픔이 선율에 깔려 있다.

"일생일장은 춘몽이요 세상공명은 꿈밖이로구나…" ''수심가''를 들으면 알 수 있듯 서도소리는 창법이 특이해 콧소리로 얕게 떨다가 큰소리로 길게 뽑은뒤 갑자기 다시 콧소리로 변한다.

''수심가 토리''라고 부르는 이 장식음은 오죽하면 대동강 물을 먹지 않은 사람은 흉내내기도 어렵다고 했을까.

남도소리가 깨지는 소리를,경기민요가 고운 소리를 내는 것과 달리 서도소리는 감정의 폭이 넓고 발성법도 다양해 배우려는 사람도 드물다.

서도소리가 국악중에서도 비인기종목으로 푸대접을 받아온 것도 실은 배우기 어려운 탓이다.

오복녀(吳福女)씨는 평양에서 태어나 16세때부터 평양의 명창 장금화에게서 소리를 익혀온 정통 서도소리꾼이다.

하지만 결혼,남편의 납북,6·25동란 등 북새통에 삶의 무게에 눌려 소리는 생각도 못했다.

정작 소리인생을 다시 시작한 것은 뒤늦은 50대 중반부터다.재능을 인정받아 1971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29호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그는 일제때 서도명창 김밀화주를 이은 유일한 생존자로서 적통의 자리를 지켜왔다.

서도소리 원형보존에 대한 집념도 남달랐다.

보존회를 이끌어 오면서 78년에는 서도소리 42곡의 발성법을 쉽게 기호화한 ''서도소리교본''을 펴내기도 했다.

90년 평양 통일음악제에 참가해 서도소리가 본고장에서 맥이 끊긴 것을 확인하고는 통일이 되면 다시 서도소리를 가르쳐야 한다며 제자들을 다그쳤던 그가 89세로 타계해 엊그제 장례를 치렀다.

훌쩍 떠난 그 대신 외로운 서도소리의 맥을 이어갈 제자들이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