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10월 12일,고종은 소공동에 새로 쌓은 원구단에서 황제로 즉위한다는 사실을 하늘에 고하는 고천지제를 올렸다.

다음날인 13일에는 조서를 내려 제위에 오른 것과 국호를 "대한"으로 정했음을 선포했다.

그리고 14일에는 이 사실을 각국 공사관에 통보했다.

왕조사상 최초로 중국에 고명사신을 보내 승인을 받지않고 하늘에 직접 고한뒤 제위에 올라 자주독립국임을 선포한 쾌사였다.

이전에는 중국의 천자가 아닌 조선국왕은 직접 하늘에 제사지낼 권한도 없었다.

고천지제에 앞서 고종은 길지를 택해 원구단을 쌓을 것을 지시했다.

지관이 찾아낸 "해좌사향"의 길지가지금 소공동 조선호텔 일대였다.

태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의 집터로 뒤에는 선조의 세째 아들 의안군의 별궁이 들어섰던 곳이다.

또 임진왜란 후 한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거처가되기도 했다가 명의 사신을 접대하는 남별궁을 두었던 자리였다.

이 명당에다 하늘에 제사지내는 단은 둥글게,땅에 제사지내는 단은 모나게 쌓는다는 "천원지방"원칙에 따라 원단을 쌓고 12계단을 만들었다.

주위는 세겹으로 토담을 둘렀다.

그뒤 1899년 원단 한쪽에 신위를 보관하는 황궁우를 건립했다.

1902년에는 고종즉위 40주년을 기념해 돌북 3개로 된 석고단도 만들었다.

1913년 조선호텔이 들어서면서 원단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금은 67년 사적 제157호로 지정된 황궁우와 석고단,그리고 3개의 아치로 꾸며진 석조대문만 남아있다.

3층의 팔각당인 황궁우는 복잡한 양식의 특수하고 정교한 건물이고 제천 악기를 상징하는 돌북에 부각된 용은 조선말 조각의 최걸작품으로 꼽힌다.

빌딩숲에 가려 보이지도 않던 원구단유적지가 공원으로 단장돼 어제부터 도심속 휴식처로 개방되고 있다.

서울시가 주변의 땅을 더 사들여 만든 작은 사적공원이다.

이제는 이땅 이 집의 옛일을 아는 사람도 드물다.

결과야 어찌됐든 이곳은 망국직전 열강의 굴레를 벗어나 자주독립국가를 세우려는 민족자각의식이 응집됐던 마지막 장소였다는 점에서 기억되어야 할 곳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