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

그 말을 발음해 보면 아무런 메아리가 없다.

이산가족에 대해 우리가, 아니 내가 더 특별히 "덧나는 마음"을 갖는건 내가 이산가족 2세이고, 또 우리가 이 지구상에서 최고.최악의 남.북 분단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의 정체성은 "이산가족 2세"라는 데서 찾아야 할 것 같다.

그걸 염두에 두지 않고는 가족들의 지난한 상처들을 아물릴 수 없을 듯하다.

내 가족의 시초, 그러니까 "나의 시초"는 남.북 분단, 그 이산의 역사로부터 나온 것이기에.

함경북도가 고향인 아버지는 월남하여 이남 땅에서 새 가정을 이뤘다.

38선이 뚫려 곧 돌아갈 줄 알았건만 다시 그어진 휴전선은 10년을 기다려도 뚫릴 줄 몰랐다.

희망은 없었다.

그런 중에도 좀 색다른 희망은 왔던 것일까.

새 가정이 이루어졌고 정착하게 됐다.

어린 시절의 잊혀지지 않는 큰 기억 하나, "이북 5도 향우회"라는 게 있었다.

이북이 고향인 실향민들이 남한에 내려온 고향사람들과 친지들을 찾고 모아, 한마디로 "고향을 잊지 말자, 우리는 돌아갈 고향, 즉 뿌리가 있다"는 실존감을 잃지 않으려는 안간힘 같은 거였다.

물론 지금 생각해 보니 그렇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내내 1년에 한번씩 그 향우회에 나가야 하는건 가족의 아주 큰 행사였다.

어린 우리 형제들은 별로 가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향우회 날만은 결코 다정하달 수 없는 아버지가 형제들 손목을 이쪽저쪽으로 쥐고 이끄는 거였다.

가장인 아버지는 가족들의 곤고(困苦)한 생활을 위해 애쓰기보다는 오직 그 향우회 날을 위해 한해를 기다려온 사람처럼 "그날 그 모임"을 사랑하는 것 같았다.

"향우회 날은 아버지 날"이라고 할 수도 있을만치.

매년 여름철이면 남이섬이나 도봉산 계곡 등의 모임장소에서 대단히 낯설고 어린 머리로는 알 수가 없는 장면들을 목격해야 했다.

아버지가 우는 것이다.

결코 다정하고 또 마음 약하고 보듬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던 아버지가 우는 것이다.

아버지 뿐만이 아니라 아버지 또래의 남자 어른들이 눈물을 훔치곤 하는 것이다.

어김없이 "두만강 푸른 물에"가 터져 나오곤 했다.

어린 자녀들이 올려다 보는 것도 아랑곳없이 남자 어른들이 부둥켜 안고 엉엉 울기도 하는 것이다.

1년에 한번씩 우리 형제는 놀라고 의아해 해야 했다.

"아버지가 운다"

돌이켜 기억해 보면 아버지는 그때만이 진실했고 그때만이 약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다들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차칸 속에서도 아버지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곤 하였다.

남자 어른의 붉게 운 두눈의 기억.

1972년 "남북 7.4 공동성명"이 처음 발표되던 날.

라디오 앞에서 종일 귀를 떼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아버지를 또 낯설게 목격해야 했다.

저토록 고향이라는 말만 나오면 안절부절 못하는, 북쪽 고향의 첫 부인과 갓 태어나 놓고 온 첫 딸에게만 돌아가고픈 사람.

남한 땅에서 난 첫 딸인 나에게 북에 두고 온 갓난 딸의 이름을 그대로 똑같이 지어 붙여야만 했던 사람.

이런 정도가 사춘기때 내가 가졌던 아버지에 대한 이상야릇한 감정이었고 의문이라면 의문이었다.

그러면서 이산가족 2세로서 "실향"이니 "실향민"이니 "1천만 이산가족"이니 "남북"이니 하는 단어들을 익히기 시작했던 것이다.

1천만 이산가족이 있다 한다.

그들이 모두 실향에 병들어 몸과 마음이 아프며 분단 이후의 어쩔 수 없는 생을 무기수처럼 어렵고 괴롭게만 살았다곤 생각지 않는다.

개인인 제 힘으론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는 기막히고 무서운 역사,정치의 소용돌이에 떠밀리면서도 주어진, 아니 던져진 현실에 슬픔덩이인 채로나마 꿋꿋이 일어선 사람도 적지 않으리라.

새 가족 새 이웃과 더불어 조그맣다면 조그만 안정, 행복, 빛을 만들어 산 사람도 적지 않으리라.

연약한 생명, 인간이라는 조건에 무릎 꿇으면서.

나의 가족사 한토막을 이렇게 자세히 기억해 보는 것은 많은 이산가족의 50여년 긴 삶이 이런 낯설음과 애타는 심정속에 비슷하게 놓였던 것만 같이 느껴져서다.

나의 아버지의 경우가 좀 지나친 면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주어진 환경을 받아들여서 거덜난 삶을 추스려 미래를 향해 가꾼 더 많은 실향의 아버지들에 비하면.

그렇지만 분단과 전쟁이라는 비극을 일시에 겪은 개인의, 그래서 경제적 사회적 파탄으로 뚫린 정신적 공황을 이해한다면야 무슨 비교가 있으랴.

분단 55년이 흘렀다 한다.

55년만에 남북한의 정상이 만났고 이 자리에서 역사적인 "6.15 합의"가 이뤄져 이산가족 상봉 허용이 곧 현실화될 예정이라 한다.

그런데 1백명만?

아니 이산가족 1천만명중에 이미 죽은 사람이 많다 해도 아직 수백만명이 살아 있는데, 정상들이 만나 이뤄낸 합의가 단 1백명?

난 나의 아버지가 북쪽 고향과 가족 방문을 이 생이 다하기 전에 꼭 이루기를 바란다.

긴 세월의 불행과 슬픔을 치유받고 또 남보다 더했던 "그리움"의 독을 녹이기 바란다.

당연히 모든 이산가족 1세들도 마찬가지로.

날짜를 손꼽아야겠다.

muwoosu@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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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약력 =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시집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