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배 < 정치부장 / 부국장대우 >

불과 얼마전, 뉴 밀레니엄을 맞은 이 땅의 정치지도자들은 저마다 "화해의
정치" "상생의 정치"를 다짐했다.

금새라도 정쟁을 끝내고 국사에만 전념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정치판은 호전되기는 커녕 최악의 사태가 우려되는 상황이다.

16대 총선을 앞두고 지역감정을 들먹이는 패거리정치가 여기저기서 자행
되고 있기 때문이다.

역대 선거중 지역감정에 호소하는 가장 저질의 선거가 될 것이라는 증거가
곳곳에서 포착된다.

특히 이번 총선은 차기 대통령선거의 향방을 결정짓는 기싸움의 성격까지
가미돼 그 열기는 용광로 이상으로 달아오를 전망이다.

"어떻게 잡은 정권인데..."하며 정권재창출을 노리는 집권당과 "정권을
기어코 되찾겠다"는 야당이 예각으로 맞서 벌써부터 마타도어가 횡행하고
있다.

지금 기존 정당들은 지역 중심으로 그 기반을 더욱 공고히 다져가고 있다.

여기에 신생정당들까지 비집고 들어서고 있다.

하나같이 지역할거와 지역패권 타파를 내걸었다.

그러나 이는 무늬일 뿐이다.

특히 한나라당의 공천파동이 망국적인 지역감정을 촉발하는 기폭제가
되고 있다.

소위 TK당 PK당 하면서 물밑에서 진행해오던 창당작업이 수면위로
떠오르는 명분을 제공했다.

소위 "제4의 정당"이라는 민주국민당이 만들어진 것이다.

민국당 창당준비위원들은 다투어 영남지역의 맹주인 김영삼 전대통령을
찾고 있다.

YS의 도움없이는 정당으로 홀로서기가 어렵다는 얘기다.

바꿔 말하면 부산.경남지역을 업어야 정당의 존재가치가 성립된다는
논리에 다름 아니다.

이에 질세라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도 전격적으로 상도동을 찾았다.

무엇이 그리 급했던지 측근들도 모르게 이른 새벽에 상도동 대문을
두드렸다.

그토록 "3김청산"을 외치던 이 총재의 상도동 방문에 모두가 놀랐다.

이 총재는 YS를 만나 "지금은 국난이니 국가지도자로서 도와달라"고
호소했다고 한다.

IMF를 불러온 나라망친 대통령, 지역을 볼모로 한국의 정치를 후진국
수준에 머물게 한 대통령이라고 매도하던 이 총재가 한 수 부탁했다니
이 상황을 달리 설명할 재간이 없다.

하루전까지도 YS를 비판하던 그였다.

이 총재의 자존심을 차치하고라도, 그가 일관되게 주장해오던 "3김청산"의
논리는 무엇이었는가 하는 비판이 여기저기서 쏟아져나왔다.

이 총재 역시 "한나라당=영남"이라는 등식을 부인하기 어렵게 돼있다.

작금 진행되는 지역감정의 문제에서 자민련 김종필 명예총재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입장이다.

김 명예총재는 지난 2년여동안 공동정권의 한 축으로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국정을 운영해왔다.

김 대통령과는 한치의 의견차이가 없는 형제간의 우의를 과시했고,
국민회의(민주당 전신)와 자민련은 찰떡궁합임을 누누히 강조했다.

그런 둘 사이가 하루 아침에 이혼을 선언하고 원수로 돌변했다.

시민단체들이 김 명예총재를 정치부적격자로 지목한 게 단초였다.

권력핵심부와 시민단체간의 근거없는 음모설도 제기됐다.

이를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오히려 고도의 계산이 깔려있다는 의혹이 많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김 명예총재는 충청권 챙기기에 나섰다.

정부와 청와대를 공격하면서 차별화를 시도하고 나선 것이다.

선거전략으로 불확실한 다수(전국)보다는 확실한 소수(충청권)를 선택한
셈이다.

또 민주당 이인제 선대위원장이 논산.금산 출마를 선언하자, 김 명예총재는
"감히 무엄하다"며 대노했다고 들린다.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것은 유권자의 몫이다.

정치지도자들이 손바닥만한 나라를 이리저리 갈라놓고 "이 땅은 내것이다"
며 제왕노릇을 하고 있는 모습은 보기에도 딱하다.

김용환 의원이 만든 한국신당도 결국은 지역을 기반으로 한 당이다.

자민련에서 분가한 한국신당은 이념이나 정책면에서 차별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새천년 민주당 역시 호남지역당의 이미지를 탈피, 전국정당을 표방하며
창당됐지만 국민회의와 무엇이 다른지 확연히 설명하기 어렵게 돼있다.

이같이 기존정당 신생정당 할 것없이 지역당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심화되는 형국이다.

총선에서 이를 한껏 이용할 공산이 크다.

정당이 겉옷만 바꿔 입었을 뿐 속 내용은 그대로이다.

일부 정당의 경우는 평균수명이 5년도 채 안되는 선거용 포말정당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세계는 바야흐로 네트워킹화되면서 디지털시대를 맞고 있다.

우리 국민들은 이러한 시대의 조류에 뒤지지 않으려 그야말로 필사의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런데 정치인들은 여전히 구석기 시대의 사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밀레니엄시대에 또 망국적인 지역감정이라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 youngbae@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2월 2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