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들이 풀을 뜯는 한적한 시골마을 전북 정읍.

시내외곽에 위치한 영파동 동사무소에 50대중반의 사람이 들어섰다.

당당한 체격과 인상으로 미루어 한자리 했음직하다.

그는 먼저 실무 직원을 찾아 90도로 꾸벅 절했다.

그뒤 여러 사람에게 앞으로 잘 부탁한다며 정중히 인사했다.

그가 내민 명함에는 "주식회사 서전 사장 육동창"이라고 씌어있었다.

지난 85년 안경업체 서전을 창업하면서 인사를 다니고 있었던 것.

명함을 받아든 지방 공무원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육 사장이 무엇을
했던 사람인지 알아차렸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다.

우리같은 직원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다니.

육군준장으로 중앙정보부 국장을 지낸 인물이었기 때문.

70년대말 중앙정보부의 위상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한마디로
설명된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뒤 서전은 세계적인 안경업체로 성장했다.

바탕에 그의 겸손이 스며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관계 금융계 학계 등에 있다가 나와 창업한 사람중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고위 직책을 맡다 나왔을 경우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하다.

이유중 하나는 자존심을 꺾지 못한다는 점이다.

"내가 어떻게..."라며 되뇌다 마침내 망하고 만다.

자존심을 접어야 하는 까닭은 간단하다.

사업에 관한 한 아직 유치원생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승승장구했던 분야는 사업이 아니다.

아무리 열심히 사업에 대해 연구하고 옆에서 지켜봤다 해도 마찬가지다.

자동차에 관한 책을 열심히 읽은 사람이라도 핸들을 직접 잡아보지 않으면
운전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기업경영은 냉혹한 현실이다.

말로 설명하지 못하는 복잡다기한 사항이 있게 마련이다.

모 대학 경영학과 교수가 남동공단에 있는 중소업체를 컨설팅했다.

해당업체의 사장은 그렇게 박학다식하니 아예 1년동안 경영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쾌히 승낙했다.

1년 뒤 회사는 거의 결딴날 지경에 처했다.

이론과 실제는 너무 달랐던 것.

그가 공장을 떠나면서 남긴 한마디는 "누구에게도 내가 경영했다는 사실을
얘기하지 말아달라"는 것이었다.

< 김낙훈 기자 nhk@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2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