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필종부가 강조됐던 탓인지, 부인의 인격도 그만큼 인정했던 탓인지는
몰라도 조선왕조에서는 남편의 관직 품계에 따라 부인에게도 그에 상응하는
품계를 주었다.

정종 1품관료 부인은 정경부인, 정종2품은 정부인, 정3품 당상관은 숙부인
이란 칭호를 썼다.

남편의 승진과 함께 부인의 직급도 따라서 올라갔다.

당시 용어로는 고신이란 신분인증서 비슷한 첩지까지 받았으니 어떻게보면
요즘 고관들의 부인들보다 나라로부터 확실한 인정을 받은 셈이다.

그만큼 품위를 지켜가기도 힘들었다.

청렴과 공사의 구분을 분명히 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던 조선왕조의
선비풍의 고관들이나 그의 부인들은 일부러 사치나 재물을 피하고 멀리했다.

벼슬길에 올라 아무리 오래 있어도 청백리의 가난한 살림은 여전했다.

사사로이 갖다 바치는 뇌물은 종이 한 장도 받지않았기 때문이다.

"구운몽"을 쓴 김만중의 어머니는 윤씨는 남편 김익겸이 병자호란때
순국하자 베를 짜서 내다팔아 두 아들을 키웠다.

윤씨는 아들이 대제학을 지내고 맏손녀가 숙종의 왕비가 됐어도 끝까지
왕비에게 청하나 넣지 않고 가난하게 살면서 정경부인의 품위를 지킨것으로
유명하다.

"베갯머리 송사"니 "베냇 밑 공사"니 하는 옛 말이 지금까지 쓰이는 것을
보면 잠자리에서 아내가 속삭이듯 전하는 청탁은 효력이 아주 뛰어난 모양
이다.

그러나 축첩이 용인됐던 조선에서는 대부분 첩실들이 "베갯머리 송사"에
능했다.

"성종실록"에는 병조판서 성준의 첩 이덕에게 뇌물과 함께 청을 넣으면
원하는 관직을 어떻게나 잘 얻을 수 있었던지 그를 "규방의 이조판서"라고
불렀다는 사관의 기록이 전한다.

또 중종때는 첩들이 오히려 정실부인들보다 재물이 훨씬 더 많아 흉년에
들면 돈을 모아 기민구제에 나섰던 탓으로 "소가구황"이란 말까지 나돌았다는
기록도 있다.

요즘 몇몇 전.현직 장관부인들이 연루된 "옷 로비설"로 온통 나라안이
떠들썩하다.

결과야 어찌됐든 사치와 재물을 멀리하는 정2품 정부인의 품위를 지키지
못했다는 비난을 면하기는 어려울것 같아 보인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5월 2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