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발전을 촉진하기 위한 수단으로 은행신용을 이용하는 한, 우리는 그
결과인 경기순환을 감내해야만 할 것이다.

어떤 의미로는 그것(경기순환)은 ... 그 대가이다"

- 하이에크의 ''화폐이론과 경기순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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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세기 초 빈은 독특한 도시였다.

쓰러져 가는 늙은 제국 오스트리아는 최후의 부르주아 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웠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과 포퍼, 작곡가 말러 등 20세기 정신세계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많은 천재들을 배출한 것도 이 시기였다.

경제학에 있어서도 오스트리아 학파가 이 시기에 전성기를 구가했다.

74년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하이에크(1899~1992) 역시 이때 빈이 낳은
걸작이었다.

그는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에서 출발했지만 경제학을 뛰어넘어 철학과
사회과학 전반을 포괄하는 자신만의 학문체계를 구축하는데 성공한 학자다.

하이에크의 지적 이력은 대략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기는 오스트리아 학파의 경기순환론을 계승하면서 케인스 경제학과 대립
하나 실패로 끝나 버리는 시기.

2기에는 시장을 자원배분 문제로 접근하는 신고전파 전통과는 달리 시장을
지식(정보)의 분업문제로 접근하는 그의 시장이론이 전개된다.

1960년 "자유헌정론" 출간이후로 볼 수 있는 3기에는 그의 자유주의사상이
진화적 질서론의 토대 위에 확립된다.

1932년 런던 LSE 대학 투크 석좌교수로 영국으로 진출하면서 그는 영국
경제학계에 오스트리아 학파, 특히 본 미제스에서 비롯된 자신의 화폐적
경기순환론을 소개한다.

그의 경기순환론은 현대금융제도 속에 내재한 화폐 및 신용의 팽창 경향이
시장이자율을 자연이자율 수준에 비해 과도하게 낮춰 과잉투자, 우회적 생산
방식의 확장 등을 유발하고 그 결과 인플레이션과 공황이 초래된다고 경기
순환 현상을 설명한다.

그러나 이것은 케인스의 설명과는 양립할 수 없었다.

케인스는 오히려 과소투자(유효수요 부족)에서 공황의 원인을 찾았으며 또
그의 실업이론은 인플레이션을 동반하지도 않았다.

이런 까닭에 케인스와 스라파, 칼도어 등 영국 케인스 학파는 하이에크를
집요하게 비판하고 또 공격했다.

이 십자포화에 패배한 하이에크는 이론적 경제학과 결별하게 되며 결국에는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향하게 된다.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주창한 대중서인 "예종에의 길"을 집필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러나 케인스와의 대결이 반드시 "이론적" 대결이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영국 경제학자들의 "섬나라 근성"이 하이에크가 소개한 "대륙(오스트리아)"
경제학을 맹목적으로 배척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힉스에 따르면 하이에크 경제학은 이론적으로 거부된 것이 아니라 그저
손가락 사이로 새나가버렸던 것이다.

더구나 하이에크에 의하면 공황에 수반하는 생산파괴와 대량실업은 근본적
으로 인위적 화폐 및 신용 팽창으로 인한 상대가격의 왜곡을 해소시키는
과정이다.

따라서 당시 대공황에 대한 그의 처방은 당연히 경기부양을 위한 또다른
인위적 개입이 가격왜곡을 한층 더 심화시키므로 이를 피해야 한다는 "방임
주의"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소극적 처방은 당시의 대공황 상황에 전혀 걸맞지 않은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에크는 시대에 의해서도 거부됐던 것이다.

그러나 70년대 이후 하이에크는 부활하며,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IMF식 시장
주의 처방이 30년대 하이에크와 기본적으로 동일한 사고지평에 놓여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김균 <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kyunkim@kuccnx.korea.ac.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3월 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