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후 민속명절 추석이 다가오면 귀성길에 오른 긴 차량 행렬이 거북이
걸음을 할 것이다.

무엇이 해마다 이같은 고행을 반복하게 만드는가.

근대화 이전 전통사회에서도 "자식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라"는 말이 있듯이
야심찬 사람들은 부귀영화의 기회를 잡으려 고향을 등지곤 했다.

그러나 인구의 대규모 이동을 부채질한 것은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비중을
높이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산업화의 물결이었다.

60년대 초만 해도 인구의 대다수가 농촌인구이고 농업이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높았다.

그러나 지난 40여년간 경제성장 과정에서 인구및 산업구조는 엄청나게
변했다.

취업인구 중 농림어업 인구는 약 11.6% 수준(96년), 국내총생산중 농림어업
비중은 5.7%(97년)에 불과하게 되었다.

IMF사태후 첫 고향길 나들이에 나선 귀성객들은 선물은 줄고 근심은 늘어난
짐보따리를 꾸릴 것이다.

이들이 찾아간 농촌 사람들도 시름속에 있을 것이다.

전국을 골고루 맹타한 폭우로 집 잃고 논밭농사가 망쳐진 시름이 클 것이다.

다행인 것은 늦더위 덕에 쌀 농사는 그래도 평년작 수준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다.

얼마전 전국 각지 농민 "대표"들이 대거 서울로 올라와 농촌부채 탕감을
요구하는 궐기대회를 가졌다.

붉은 머리띠, 깃발, 몸짓 등이 노사분규 현장을 방불케했다.

오죽했으면 저럴까하는 동정심이 앞섰다.

그러나 경제는 냉정한 현실인지라 이들의 주장을 곱씹어 보아야 한다.

요구사항의 초점은 상호금융대출 금리 2%포인트 인하와 상환기간 연장으로
요약된다고 한다.

상호금융이란 무엇인가.

전국 1천2백여개 회원조합에 회원들의 예수금을 받아 운용하여 이익을
나누어주는 금융이다.

이 자금덕분에 농자재 공급, 농산물 유통 등 경제사업이 활발해진다.

여유자금이 생기면 중앙회에 맡겨 고수익 금융상품에 운용해야 회원
조합원에 높은 이익이 되돌아간다.

농협에서 돈 많이 빌려쓰는 농민은 담보력 영향력 등 상대적으로 남보다
나은 사람들이다.

이들 상당수는 지난 수년간 농업 부문에 투입된 40조원 이상 구조개선
자금의 수혜자이기도 하다.

반면 채무를 가급적 기피하는 건실한 농민과 담보력이 부족한 영세농민은
빚이 적다.

상호금융 대출금리 인하는 결국 전자가 후자를 희생시켜 소득 재분배 효과를
얻는 수단이다.

"장님 제집 닭 잡아먹기"라면 그래도 좋겠는데, 목소리 큰 사람이 내놓고
남의 집 병아리 서리하는 꼴이다.

국민생산의 대부분이 농업에 있던 전통사회에서는 그야말로
"농자천하지대본"이었다.

오늘날의 냉철한 경제현실은 그 가치를 퇴색시켰다.

만일 농업만으로 한국경제를 구성한다면 GNP는 몇분의 1이상 줄게된다.

그러나 농촌에 아직 다행한 것은 아직 국민 대다수가 이농 1세대이기 때문에
애향심이 살아있고, 소선거구 덕분에 농촌인구의 정치영향력이 도시인구보다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말하자면 "농자정치지대본"인 셈이다.

그래서 농촌부채 탕감이 선거공약으로 등장했고, 정부는 재정이 어려우니까
농협의 상호금융에 부담시키고 생색을 내려한다.

눈치 빠른 정치인, 감상적 지식인은 그들 자신은 농촌에 살 생각은 추호도
없으면서 농촌 사랑 발언을 입에 달고 산다.

궁하면 안보논리를 동원하지만, 장거리 유도탄이 날으는 속전속결의 과학
전쟁 시대에 설득력이 미약하다.

더구나 한국이 세계무역기구(WTO)의 신국제경제질서 속에서 낙오하지
않으려면 지식사회 정보사회로 변모해야 한다.

농촌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저녁 노을진 산자락 모퉁이에 옹기종기 모인 농천마을의 그리움은 한가한
문필가의 글속에 머물러야 한다.

살아 움직이는 농촌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막연한 동정론이 아니라 냉엄한
경제논리로 단련시켜 다음 세기에 과학영농이 꽃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정부도 얄팍한 정치계산으로 농민을 우롱하지 말고 새로운 농촌사회를 일굴
수 있는 장기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9월 2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