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뇨병(대기업병)과 급성패렴(적자)이 합병증을 일으킨 성인병 환자"
"경영이 없는 회사"...

지난 87년, 일본최대의 화섬업체 도레이에 최고경영자(CEO)로 취임한
마에다 카츠노스케 사장의 입에서 이런 험악한 표현이 나왔다.

그러나 경쟁사를 헐뜯는 얘기가 아니었다.

자신이 이끌어가야 할 도레이에 대한 평가였다.

그의 도레이 대수술은 이런 비정한 진단에서 시작됐다.

그로부터 10여년.

도레이는 세계 82개국에 공장과 판매법인을 가지고 있는 일본의 대표적인
글로벌 기업으로 떠올랐다.

97회계연도(97년 4월~98년 3월) 매출액은 1조엔(약10조원)을 넘었다.

순익도 2백50억엔(2천5백억원).

도레이는 성장, 수익성, 업계위치등 어느면에서나 손꼽히는 최우량기업으로
부활했다.

그동안 섬유산업 환경은 오히려 열악해졌다.

그런데도 도레이의 실적은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10년간의 대수술이 성공을 거둔 것이다.

지난 60년대 도레이는 일본산업의 대명사였다.

당시 도레이의 별명은 "무로마치통산성"이었다.

무로마치는 도레이의 본사가 있는 도쿄의 상업중심지 지명.

통산성에 비유될만큼 도레이는 일본의 간판기업이었다.

대졸자들사이에도 입사희망 1위의 기업이었다.

그러나 80년대 들어서면서 도레이는 섬유산업의 사양화라는 추세에
휩쓸려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80년대 중반에는 엔고까지 겹쳐 불황의 파고가 더 거세졌다.

도레이는 부동산을 매각해 겨우 배당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마에다 회장이 사장에 취임한 것은 도레이가 이런 중병을 앓고 있던
87년이었다.

마에다 사장은 "강력한 리더쉽"을 휘두르며 도레이 대수술에 착수했다.

리더쉽의 양대기둥은 틀을 깨는 발상의 전환과 확고한 장기비전이었다.

마에다사장이 취임할 당시 일본 섬유산업 성장율은 2%였다.

수입품까지 물밀듯 들어왔다.

당시 연간 수입초과액은 100억달러.

개도국에게 주도권을 넘겨줄 판이었다.

그러나 마에다 사장은 역발상을 통한 공격경영으로 상황을 뒤집었다.

그의 역발상은 섬유산업이 성장산업이라는 것.

섬유산업도 최소한 4~5%의 연평균 성장이 가능한 산업이란게 그의
논리였다.

이런 기반위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다.

도레이가 92년부터 3년간 섬유부문에 쏟아부운 돈은 1천9백억엔(약
1조9천억원).

성숙산업이란 판단이었다면 엄두도 못낼 엄청난 투자다.

마에다 사장은 어떤 근거로 이런 과감한 투자를 단행했을까.

해답은"글로벌 마인드"에 있었다.

그는 일본 내수시장만 한정하고 볼때 섬유가 성숙산업이란 사실에는
동의했다.

그러나 개도국에선 다르다.

거기선 섬유가 아직도 주요산업이다.

전세계 관점에서 보면 섬유산업은 한창 자라는 청년기 사업이란 얘기다.

더욱이 섬유는 인간 생활의 기본인 의식주중 하나다.

섬유산업은 인간이 살아있는 한 없어서는 안 되는 기간산업이라는게
그의 지론이었다.

기호에 맞춘 새로운 제품을 계속 만들어 나가는 한 유통구조나 엔화환율에
문제가 생겨도 제조업체는 국내에서 계속 살아남을 수 있다고 그는 확신했다.

이런 역발상을 통한 과감한 경영덕분에 도레이는 동남아에 생산기지를
구축, 이지역에서만 연간 2백20억엔 이상의 경상이익을 올리고 있다.

마에다 사장이 제시한 장기비젼도 도레이 회생의 핵심비결이었다.

마에다 사장이 취임할 당시 도레이는 "이상결핍증"에 걸려있었다.

마에다 사장은 빈사의 도레이에 "3G"라는 영양제를 꽂았다.

3G란 "성장(Growth)", "세계화(Globalization)", "그룹관리(Group
Management)".

91년에 공표된 도레이의 장기비전 "뉴 AP G 2000(Action Plan G 2000)"의
키워드 이기도 했다.

이는 도레이의 주력사업이 섬유임을 다시 한번 확고히 하고 이를
바탕으로 21세기로의 새로운 도약을 추구하는 미래상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 안에 따라 도레이는 사업군을 크게 3개 영역으로 나눴다.

<>섬유사업 <>수지/필름, 케미칼을 포함한 화학산업 <>신사업인 복합재료
사업 등이다.

복합재료 사업은 의약/의료사업, 환경기기사업, 전자정보 기자재사업
또는 휴먼 서비스적인 사업을 말한다.

섬유라는 본업을 강화하는 한편 의약, 전자등 7개 분야를 전략적으로
육성해나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런 사업전개 방향의 나침반이 바로 3G였다.

글로벌 마인드를 통해 성장의 기회를 발견하고 이를 그룹경영이라는
형태로 완성시켜가자는게 3G의 목표였다.

이런 독특한 경영을 밀고나가는 과정에서 보수적인 일본 재계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일본 화섬업계가 과잉생산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지난 93년의 일이다.

그해 2월 미쓰비시레이온, 데이진등 일본 화섬업체들은 추락을 거듭하던
의류원료용 폴리에스테르 원사의 감산에 합의했다.

그러나 마에다 사장은 여기에 동참하지 않았다.

업계의 비난이 쏟아졌지만 마에다 사장의 의지는 확고했다.

경쟁력없는 업체를 살리자고 경영합리화로 불황에도 끄덕없는 도레이가
희생할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도레이는 당시에도 1백% 풀가동을 누리고 있었다.

호황기의 구조조정 덕분이었다.

도레이는 80년대초 호황기에도 설비증설에 나서지 않았다.

타사로부터 실을 구매, 시장에 공급함으로써 호황기의 늘어난 수요에
대처했다.

외부 실구매는 월평균 6백~7백t에 달했다.

이는 도레이 판매의 7%에 해당했다.

외부구매 중단만으로도 7%의 감산효과가 있었던 셈이다.

그 무엇보다도 일찌감치 달러당 1백엔의 엔고에도 견딜만한 체력을 다지고
호황기에 감원을 단행하는등 앞선 구조조정을 실시했던게 주효했다.

남들이 증산, 인원증대에 열을 올리고 있는 동안 도레이는 2천명을 잘랐다.

그는 "리스트럭처링은 호황기에 해야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다.

불황기에 리스트럭처링을 하면 경영상 틈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는 또 고용 기회를 창출할 수 있는 호황기야말로 리스트럭처링을 실시할
적기라고 강조한다.

"호황기의 불황대비, 불황기의 호황 대책".

이런 마에다 사장의 경영철학이야 말로 오늘날 도레이를 있게 한 원천이다.

< 노혜령 기자 hroh@
임완 AT커니 컨설턴트 seoul-opinion@atkearney.com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8월 2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