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노동당 정부가 집권한 45년부터 51년 사이에
급격한 국유화를 단행했다.

79년 보수당의 대처행정부가 들어 설 때까지 이 추세는 거의 4반세기에
걸쳐 지속되었다.

대처 행정부가 출발하던 79년 영국 공기업들은 GNP의 10.9%에 달하는
1백80억430만파운드를 생산하고 있었다.

전체 노동력의 8.1%인 2백6만5천명을 고용하고 있었고 총고정자본스톡의
17.2%에 해당하는 1천40억1천만파운드를 보유하고 있었다.

총투자의 15%는 공기업 몫이었다.

또한 공기업들이 고용한 노동자들은 공무원들 이었으며 사업영역은
공익산업이라 불려지는 전기 통신 가스 수도는 물론 철강 항공 자동차 조선
금융및 석유산업을 망라하고 있었으며 그 기업의 수는 46개에 이르고 있었다.

이들 공기업이 지향하는 목표는 공익의 극대화였으며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의회, 행정 각 부처및 독점.합병위원회 (MMC: Monopolies and Mergers
Commission) 등이 법적 행정적 감시와 규제, 재정적 통제를 행하고 있었다.

또한 공기업이 경제적 효율성과 공평성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의회나 행정부는 공기업들의 목표를 설정하는 등의 의사결정권을 갖는
반면 일상적인 경영은 개별공기업의 경영진이 맡게 하는 등의 운영원칙을
시행하고 있었다.

이와같은 대단히 큰 공기업의 비중은 정부가 공급자 또는 수요자로서
영국의 모든 기업들에 영향을 미치도록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경제 전반에 걸친 이러한 정부개입의 결과는 공기업들의
만성적인 적자와 서비스 또는 품질의 저하, 공기업을 중심으로 해서 발생하는
이해 당사자들의 독점적 지대 추구행위들로 인해 대대적인 구조개혁을
시행하지 않는한 영국경제가 회복 불가능 상태에 이르게 만든 것이었다.

"영국병"이라는 유행어가 바로 이 시기 경제운영의 산물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영국병을 치유하기 위한 개혁은 역대 보수당 행정부들과도 완연히 다른
철학과 정책을 표방한 대처 행정부에 의해 대대적으로 시행되었다.

79년부터 89년까지 대처 행정부에서 후생.재무.운수성 장관을 역임한
존 무어(John Moore)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영국은 1979년 쇠퇴와 퇴락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선 채 회복 불가능 상태에
있었다.

당시 야당이었던 보수당의 비주류에서는 이러한 영국경제의 몰락이 보수당이
사회주의적 정강정책을 채택하고 있던 노동당과 동일하게 사회주의적 체제의
보편화에 주력하는 정책을 취함으로써 발생한 것이라고 진단하였다.

보수당 비주류 세력은 이와 같은 영국의 곤경을 개선하기 위해서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획기적으로 축소해야 한다는 철학과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이 세력은 70년대말 보수당의 주류가 됐고 총선에서 승리를 거둬 79년
보수당 정부를 출범시켰다.

대처 행정부는 노동당 행정부는 물론 역대 보수당 행정부와도 전혀 다른
사고를 가진 정부였다.

이 정권이 영국개혁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당시 서방세계에서
가장 용기있는 지도자의 한사람으로 꼽혔던 마거릿 대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무어 전 장관의 회고는 영국 민영화의 성공이 최고 지도자의
용기와 신념, 그리고 그를 뒷받침하는 집권세력의 일관된 정치철학과 정책적
의지에 기인함을 보여주고 있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