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업계 8위의 고려증권을 부도로 내몰고 재계 12위의 한라그룹을
쓰러지게 한 주범은 금융시장의 경색이다.

돈이 흐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은행-종금-기업으로 이어지는 자금흐름이 올스톱 상태다.

돈이 돌지 않는 마비현상은 종금사에 돈이 흘러가지 않으면서 촉발돼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섰다.

종금사는 은행으로부터 차입한 돈과 고객의 예금을 갖고 기업에 대출
(어음할인)한다.

그런데 은행권이 종금사에 대한 콜자금 공급을 중단하고 고객들이 대거
예금을 인출해 가면서 종금사로 흘러가는 자금줄이 바닥나고 있다.

지난 2일 9개 종금사에 영업정지가 내려지면서 이같은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종금사에 대한 불안감이 깊어지고 종금사에 돈을 지원하면 지급보증해
주겠다고 약속한 정부가 이를 하루만에 깨뜨린데 따른 정부에 대한 불신감이
증폭된데 따른 것이다.

은행권은 영업정지된 종금사에 정부의 보증약속을 믿고 지난 1일 8천억원을
줬다가 하루만에 물리는 일을 당하자 3일부터 종금사에 대한 콜자금 공급을
중단했다.

이에따라 종금사가 콜시장에서 조달하는 자금은 종금사 영업정지 조치
이전 3조원에서 현재 2천억~3천억원으로 급감했다.

일부 종금사 예금이 하루만에 1천억원 이상 빠지는 등 예금인출 사태도
갈수록 확산되고 있다.

종금사들의 과부족자금이 급증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

3일 8개 종금사가 1조8천억원을 못구해 부도위기에몰렸고 6일 현재 10개
종금사 3조5천억원으로 부도에 직면한 종금사의 부족자금이 급증추세를
보이고 있다.

종금사는 부도를 모면하기 위해 기업에 대출한 자금을 회수, 부족자금을
줄여 나가고 있으나 역부족이다.

현대 삼성 LG 등 3대그룹을 제외하곤 결제능력이 있는 기업이 전무
하다시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금사 어음할인 잔액이 지난 3일 현재 82조8천8백19억원으로
이달들어 사흘만에 1조6천3백82억원 감소하는 등 자금회수는 갈수록 본격화
되고 있다.

지난 6일 하룻동안에 한라그룹이 좌초하고 영진약품이 부도처리된 것은
이같은 상황에서 이미 예견된 수순이었다.

특히 종금사 스스로 당일 결제자금을 마련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기업
여신을 만기 연장 해주고 싶어도 해줄수 없다.

통상 기업이 만기도래된 어음을 결제할 능력이없으면 종금사가 당좌수표를
끊어 기업에 주고 기업은 이 돈으로 결제를 한뒤 만기를 연장하는 방식을
취해 오고 있다.

그러나 종금사가 당일 결제자금을 못구해 연장에 걸린 상황에서는 당좌수표
를 끊어줄 수 없다.

종금사에서 빠져 나간 돈은 신한 국민 주택은행 등 우량은행과 외국계
은행으로 몰리고 있다.

신용도가 덜 훼손된 이들 금융기관은 넘치는 돈을 주체 못해 콜시장에서
금융기관을 선별, 연 25%의 고금리로 돈을 대주고 있다.

기업이나 가계에 대한 대출은 IMF가 요구하는 국제결제은행(BIS)기준
자기자본비율 맞추기를 어렵게 하는데다 부실의 위험성에 노출되기 때문에
자제하고 있다.

시티은행은 자금 운용처가 마땅치 않은탓에 수신금리를 내리면서까지
수신사절을 할 정도다.

정작 돈이 필요한 곳(종금사)으로는 돈이 가지 않고 일부 금융기관에 돈이
몰리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되면서 비생산적으로 돈이 운용되는
금융공황이 금융기관 집단부도와 기업의 연쇄부도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 오광진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