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제연구원과 연세대 동서문제연구원은 지난달 30일부터 이틀간 서울
스위스그랜드호텔에서 제5차 아시아-태평양지역 경제협력 국제학술회의를
가졌다.

"기적후:동아시아 역동성의 미래와 태평양 경제질서"주제로 진행된 이번
회의는 기적으로 불리는 일본 한국 동남아시아의 경제발전동인을 진단하고
향후 새로운 경제질서가 어떻게 진행될지를 전망하는데 초점이 맞춰졌다.

또 정치 경제적 이슈와 관련된 무역 투자 금융 등의 향후 변화전망도
아울러 논의됐다.

8건의 주제발표 가운데 미국 미시건대 색슨 하우스 교수의 강연내용을
간추린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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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70년의 일인당 국내총생산(GDP)상위 14개국은 호주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 미국 스위스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스웨덴 캐나다 이태리 스페인
아르헨티나 순이었다.

그로부터 1백22년이 흐른 지난 1992년 일인당 GDP 상위국가의 순위변동은
있었지만 1870년에 부유했던 국가들이 대부분 부의 성장을 이어 받았다.

한가지 눈에 띠는 것은 아르헨티나가 상위 14개국에서 탈락한 반면 1870년
에 호주의 일인당 GDP의 5분의 1수준이었던 일본이 1백22년뒤에 일인당 GDP
랭킹 3위국으로 뛰어 올랐다.

다시말해 일본은 빈곤한 나라와 부유한 나라사이의 거대한 간격을 뛰어
넘은 유일한 사례가 된 셈이다.

최근 동아시아국가 가운데 한국과 대만의 일인당 GDP가 급격히 성장하면서
일본과 마찬가지로 비서방국가로서 세계 최부국에 끼게 될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학자들은 한국과 대만이 구소련연방처럼 총요소 생산성의
급격한 변화없이 고속성장해온 사실을 지적하고 최부국으로의 진입전망에
회의적인 시각을 던지고 있다.

그런데 미국 영국 일본 등도 상당기간동안 총요소 생산성의 급격한 증가
없이 일인당 GDP의 급성장을 기록했다.

미국 영국 일본 등의 고속성장 비결은 무엇일까.

이들 국가들은 총요소생산성의 급격한 변화는 없었지만 오랜기간을 통해
상당한 기술적 진보가 있었던 것을 꼽을 수 있다.

미국의 경우 기술분야 진보를 통해 요소생산성을 축적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예를들어 일본은 메이지시대때 면방연합회나 면방기계생산자단체 등을
통해 기술정보를 공유하면서 면방공업을 발전시켰다.

일본은 면방산업의 상품시장과 신용시장 환경이 변화하자 이번에는 잘
훈련된 기술자들간의 정보교류를 유도했다.

2차세계대전이후 50년간 일본 고용시장의 주류는 종신고용제였다.

종신고용제는 정보흐름과 기술혁신의 장애물이다.

그런데도 이 기간중 일본의 일인당 GDP는 증가했다.

일본정부가 시장경제를 표방하면서도 의도적으로 산업구조조정에 개입했기
때문이다.

광전자설계를 위해 만든 정부주도의 연구개발(R&D)조합이 대표적이다.

일본정부는 종신고용제에 따른 기술정보 흐름의 장벽을 깨기위해 연구개발
조합 프로그램을 고안했다.

일본의 연구개발조합에 대해 외국기업들은 부러운 눈치로 바라보는 반면
정작 일본기업들은 별로 중요치 않은 것으로 여기고 있다.

지난 50년간 일본은 지식중심의 성장을 이뤄온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회사
들은 과거보다 기업간 기술정보의 확산이 상대적으로 낮다고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말에 들어 세계시장패턴이 변화하고 기술선도국가로서의 불확실성이
농후해진 일본은 제도를 변화시켜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있다.

일본의 기업들은 앞으로 잘 훈련된 기술교육을 받고 인력수요변화에 따른
충격에도 견딜 수 있는 노동력확보를 선호할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일본기업은 사원훈련방식을 바꾸어야 하고 일본정부도
교육이나 사회정책을 수정해야만 한다.

한때 일본정부가 주도했던 연구조합과 같은 방식은 미래에는 중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반대로 지난 1920년대와 1930년대초 일본방직업계에 지원하던 기술보급
지원제도는 일본 미래의 한 부분이 될 것이다.

즉 업계 스스로의 기술개발과 정보흐름의 토대만 마련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과 대만이 지난 1945년이후 50년간 유지했던 일본의
제도를 수용해야 하는지 아니면 피해야 할지는 분명치 않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