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만1천4백25개사에 종업원수 95만4천명,한해 생산 1백5조원으로 전산업의
28.9%를 차지, 수출은 3백24억달러로 전체의 25%" 지난해 국내 기계산업의
성적표다.

97한국기계전을 계기로 살펴본 한국의 기계산업은 외형적으론 대단한
성장을 이뤘으며 국내 경제에 막대한 비중을 차지하는 기간산업으로
자리잡은게 틀림없다.

자동차 등 수송기계를 제외한 일반기계부문만 살펴봐도 1만2천1백36개사
에서 30만8천명의 종업원이 지난해 35조원을 생산했고 이중 91억달러를
수출했다.

그러나 국내 기계산업의 성적표에는 "수"만 있는게 아니다.

기업규모 수요기반 기술력 등 주변여건이 상당히 낙후돼 있다.

우선 기업의 규모를 살펴보면 중소기업이 99%를 넘는 절대다수를 차지해
불안감을 던져준다.

기술력에서 살펴보면 낙제점을 면치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기계공업진흥회의 조사결과를 보면 국내 주요산업의 설계기술 등
핵심기술수준은 선진국의 45~58%선에 불과한 실정이다.

산업은행의 조사로도 국내 수준은 미국 일본 독일 등 선진국에 비해
10년 이상 뒤떨어져 있다.

기술력의 낙후는 당장 "제품을 팔면 팔수록 적자가 늘어난다"는 기형적인
경제구조로 이어지고 있다.

완성품을 만들어 수출은 하고 있지만 핵심부품이나 생산설비를 외국에서
사다쓰다보니 생겨난 기현상이다.

물건을 애써 만들어 팔아봤자 버는 것보다 생산설비를 마련하기 위해
지출하는 돈이 더 크다는 얘기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국내 업체가 설비투자를 1%가량
늘릴 경우 자본재(생산기계)의 수입은 단기적으론 0.59%,장기적으로는 1.05%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결과 지난해 한국의 무역적자 2백억달러중 기계부문의 적자가 80억달러로
전체의 40%를 차지하는 문제를 낳기도 했다.

전형적인 외화내빈 현상이다.

기계산업의 낙후성은 우리경제의 발전과 고도화를 발목잡는
아킬레스건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우리경제가 겪고있는 최근의 불황도 결국 자본재산업이 낙후됐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많다.

기계산업은 흔히 한나라 국가경쟁력의 바로미터로 불려지기 때문이다.

섬유업이든 자동차업이든 물건을 생산하려면 우선 생산설비(기계)를
사다 설치해야 한다.

따라서 전산업의 기초가 되는 기계산업이 발달하지 않고서는 경제구조의
고도화나 지속적인 성장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송장준 중소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경제불안에 대한 중장기적인
해결방법은 기계산업의 조기육성"이라며 그 근거로 기계산업은 <>높은 기술과
숙련기능이 요구돼 상당기간 후발공업국에 의해 추격당할 위험이 없고
<>전형적인 다품종소량생산 업종으로써 대기업(수요자)과 중소기업(공급자)의
협력관계 향상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기계산업이 중요한데도 왜 국내에서는 발전되지 못했는가.

전문가들은 그 이유를 여러가지로 든다.

출발점은 우선 정부의 대기업 육성정책을 들 수 있다.

당장 외화를 벌어다주는 소비재의 생산이 급하다보니 생산효율이 좋은
외국산 기계의 도입을 장려했고 상대적으로 국산기계업체가 자생할 수 있는
여력이 적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외국산 기계 우대정책은 그동안 기계설비를 구입하는 업체에
자금을 지원해주는 수요자금융에서 국산기계는 외국산에 비해 지원규모가
작고 절차도 까다로웠다는데서도 드러난다.

산업연구원 송병준 기계산업연구실장은 "경제개발시대에는 대기업이
설비투자를 한다면 정부가 정책금융지원을 해줬다.

그결과 무조건 최신 외산기계를 설치하면 곧 이익이 된다는 공식이
성립됐고 국내 기계산업의 입지는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고 지적했다.

송실장은 또 "최근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기업들은 대부분 당시에 과도한
설비투자를 한 곳들이다"며 "이제는 대기업이 자체 부담으로 설비투자에
나서야 하는 만큼 경영전략의 전면적인 수정과 국내 기계산업에 대한
육성대책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국내 기업들이 자체적인 기술개발보다는 선진국의 설비를 그대로
도입하거나 기술베끼기에만 급급했던 것도 자립역량을 갉아먹은 원인이다.

여기에는 생산의 주축을 담당해야할 기계제작업체들의 규모가 영세해
독자적인 연구개발이 사실상 힘들다는 것도 한 몫을 했다.

신현우 국제종합기계 사장은 "중소기업 혼자서는 독자적인 기술개발이
힘들다.

특히 국내에서는 소재 부품 등 관련 기반기술이 취약해 더욱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정부 학계 등 공공부문이 핵심적인 기반기술이나 시장정보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렵게 선진제품에 부끄럽지 않은 제품을 개발해놔도 시장에서 외면당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수요기업들이 외국산이라면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오케이를 하지만
국산기계에 대해서는 편견을 갖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다가 결국 "다음에
보자"고 구매를 거절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러한 외산제품 선호는 정부가 구매하는 물량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시빗거리다.

외국산은 기술심사 정도만 통과하면 되지만 국산제품을 납품하려면
생산단계에서부터 까다로운 감독과 검사를 받아야 한다.

어렵게 오케이를 받아도 향후 2년간 기존제품과 경쟁을 해서 이겨내야
한다는 단서가 붙는다.

수입제품의 국산화가 이뤄지면 외국업체들이 공급가를 대폭 낮춰 아예
생산기반자체를 흔드는 덤핑공세도 어제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자본재산업의 육성에는 자금 인력 판매 품질인증 등 적지않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경제구조의 고도화와 기술자립을 위해 자본재산업의 육성은
이제는 더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라는게 관계자들의 한목소리다.

"국산기계에 대한 수요부족 ->기술개발 저조 ->외국제품 수입 ->수요기반
악화"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할 때라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우리경제의 최대 취약부문인 기계산업이 발달하지
않는한 현재의 경제난 타개노력은 미봉책에 그칠 뿐"이라며 "정부 대학
업계가 모두 힘을 합쳐 기계산업의 육성에 공동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