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부도를 맞은 기아그룹 1차 협력업체는 모두 28개.

기아가 협력업체의 물품대를 본사 직원들의 임금보다도 오히려 우선지급,
부도업체수가 생각보다 늘어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들 부도업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다른 업체와는 전혀 거래를 하지 않고 오로지 기아에만 목을 걸고 있는
회사라는 점이다.

기아자동차와 아시아자동차의 1차 협력업체수는 모두 4백18개.

이들 가운데 1백51개 업체가 생산 부품의 전량을 기아그룹에 납품하고
있다.

기아 부도사태 여파를 벗어날 재간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나머지 업체들이 현대나 대우 쌍용에 같은 비율로 부품을
납품하고 있는게 아니다.

부품공급의 70% 이상을 기아그룹에 의존하고 있는 업체가 2백41개사나
된다.

기아에 들어오는 부품의 68.2%(금액기준)다.

이런 상황은 현대나 대우 쌍용의 경우도 별반 다를게 없다.

극히 일부 부품업체를 제외하고는 회사의 생명줄을 1개 모기업이 틀어쥐고
있다.

이른바 부품산업의 "피라미드 구조"다.

부품업체가 하나의 정점만을 바라보는 구조다.

우리와는 달리 일본의 자동차 부품산업은 "알프스 구조"로 돼 있다.

한개 하청업체가 다수의 모기업과 거래를 갖는다.

협력업체가 바라볼 봉우리가 많다해서 알프스 구조로 불린다.

피라미드 구조와 알프스 구조는 엄청난 차이다.

우선 피라미드 구조는 생산 물량이 많아질 수가 없다.

한개 모기업하고만 거래를 하다보니 납품물량 자체가 적은데다 물량 조절도
부품업체의 몫이 아니다.

부품업체들이 영세성을 면치 못하는 이유다.

당연히 품질 향상도 기대하기 어렵다.

악순환의 고리는 계속 이어진다.

부품업체들이 영세하다보니 일부 중견기업을 제외하곤 자체 개발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

그저 완성차 메이커가 깎아준 금형으로 부품만 찍어댈 뿐이다.

예컨대 국내 완성차업체가 부품업체로부터 받는 "블랙박스 부품"의 비중은
가격 기준으로 33%에 불과하다.

블랙박스 부품이란 완성차업체가 제시한 시방서에 따라 부품기업이 독자적
으로 설계도면을 만들어 완성차 업체에 납품하는 부품을 말한다.

일본업체는 이것이 70%에 달한다.

모든 것을 완성차업체가 해야 하는 국내업계와 협력업체와 힘을 나누는
일본업체와의 경쟁력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나는 이유다.

독일 자동차산업의 경쟁력은 "보쉬"에서 나온다는 얘기가 있다.

보쉬는 세계 유수의 자동차 부품업체.

현대는 이 회사와 합작한 (주)케피코에서, 기아도 역시 합작사인
(주)모스트에서 전자제어장치(ECU)를 납품받는다.

대우역시 보쉬에서 ECU를 수입한다.

보쉬가 없으면 우리 완성차업체도 서버릴 판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런 부품업체가 없다.

물론 지금이라도 완성차 업체들이 부품공용화에 나서고 공동 구매에 나서면
국내 부품업체도 대형화되고 자체기술개발 능력을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완성차업체들은 별 뜻이 없어 보인다.

혼자 욕심이 크기 때문이다.

통상산업부가 주축이 돼 95년부터 부품공용화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처음부터 복잡한 부품은 곤란하다해서 담뱃불을 붙이는 시가라이터 등이
대상이었다.

극히 간단한 부품이고 3차연도를 맞지만 아직 이 제품이 공용화됐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기아의 법정관리는 자동차산업 구조조정의 서막이다.

그러나 제아무리 완성차 업계가 기가 막힐 정도의 구조조정을 이룬다해도
부품산업의 구조조정이 이뤄지지 않고서는 헛일이 돼 버린다.

자동차산업의 경쟁력은 부품산업의 경쟁력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고광철.김정호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27일자).